북산면 소재지가 있는 오항리는 46번 국도를 타고 배후령 터널을 지나 양구 가는 길에서 추곡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을 한다. 입구의 추곡초등학교부터 오항리 배터까지는 드라이브 길로도 그만이다. 봄의 연두 빛 산에 마음이 설레고, 녹음 우거진 여름 산길, 가을의 단풍 길에 반해 귀촌했다는 이도 있고 폭설의 환상적인 마을길은 올해도 기다려진다

시내버스 장거리 운행노선 중 손에 꼽히는 노선 중 하나인 18번 버스는 후평동에서 오항리까지 운행한다. 오항리 종점에서 내리면 정자가 있고, 정자 앞으로 소양호가 펼쳐지고 배터가 있다. 예전에는 낚시꾼도 많았고 마을 사람들도 배를 타고 시내를 오갔다. 이제 선착장에는 가끔 행정선과 낚시꾼이 가끔 올 뿐이다. 쏘가리나 장어도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오항리(吾項里)라는 지형이 다람쥐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다라메기 또는 오항이라 했다는데, 목이 다섯이라서 오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떡갈목, 자라목, 용소목, 늘목 고개, 새목을 합쳐 오항이라 한다. 최근에는 면사무소 주변과 오항초교를 리모델링한 농어촌 인성학교가 있는 마을을 다람이 마을이라 부르고, 배터 주변 오항 2리를 오빛뜰 마을이라 부른다. 오빛뜰은 다섯 빛이 드는 무지개빛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다 풍요로워지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었다.

1973년 소양댐이 생기면서 북산면의 지도가 바뀌었다. 원래는 내평리에 있던 면사무소와 경찰서를 등 주요시설도 모두 수몰되어 오항리와 추곡리 일대로 옮겨졌다. 북산면사무소 앞 삼거리는 부귀리와 청평리 넘어가는 길목이다. 농협이 있어 은행 업무를 보고, 생필품과 농자재를 구입할 수 있어 오항리, 추곡리, 부귀리, 산막골, 오지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다운타운인 셈이다.

오항리 초입의 농어촌 인성마을에는 운동장의 캠프장시설은 농구장과 족구장으로 바뀌고, 어린이 풀장도 갖추었다. 오항분교 건물 뒤로 새 건물이 들어 서있었는데, 식당과 세미나실 등이 있고, 그 앞으로는 제과 제빵실과 방갈로, 잣나무 아래 벤치가 한가롭다. 관계자는 예초기로 풀을 깎고 있었다.

“주로 직장이나 학교에서 단체로 많이 오시는데, 개인도 이용할 수 있어요.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다각도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요.”

인성학교를 나와 장재골로 향했다. 오항천이 실개천처럼 장재골에 흐르고, 차 한 대 지날 정도의 작은 길을 따라 골짜기 위쪽까지 올라갔다. 논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는 장재골길은 전원주택과 옛 농가들이 잘 어우러지고 길에는 커다란 밤나무나 느티나무가 마을의 오랜 전설을 들려주는 듯했다.

“옛날에 이 골짜기에는 아주 큰 부자가 살아서 조선시대에도 장재(長財)동이라 했다는데, 저는 여기 귀농한 지 올해로 19년이에요.”

평강요양원 바로 앞에 풍채가 좋은 이준표 씨에게 말을 건넸다. 부인은 집안에서 애호박을 썰고 있었다.

“IMF 때 구조조정과 명퇴바람이 불고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도 했지만 서울에서 누군가를 짓밟고 이겨내야 하는 경쟁구도가 싫었어요. 아무 준비도 없이 막연하게 아내를 설득해서 40대에 연고도 없이 이곳에 정착을 했어요. 농사일도 모른 채 배워가며 시골생활을 시작하던 1,2년차는 즐거웠지요. 농사는 지을수록 빚이 되는 구조에서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어려움도 많았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여기 초등학교를 다니고 저녁이면 늘 밥상을 함께 하고 아이들이 바르게 커가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어요.”

방안에서 들려오는 호박 써는 칼도마 소리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상품성이 없는 호박을 썰어 말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20개들이 한 박스에 4천원으로 값이 떨어진 거에요. 박스 한 개가 1천원이니 3천원에서 운송비 등 이거저거 떼면 인건비도 안 나와요. 개당 100원이나 할라나요? 그러니 그냥 말리는 거에요. 그래도 마트에서는 7-800원은 하잖아요. 이런 유통구조는 도대체 언제쯤 바뀔까 싶어요.”

‘햇살담은 준미농장’이란 명함 뒤에 있는 ‘전통요리 연구회장’이란 직함이 궁금해졌다.

“여성농업인단체에 전통요리연구회라는 동호회가 있는데 전통 요리도 배우고, 생산된 농산물로 축제장에서 전통요리를 선보이기도 해요. 얼마 전에 소양강 토마토축제가 처음 있었는데 거기서 토마토를 활용한 전통요리를 소개했어요. 방송에도 몇 번 출연했어요. 토마토는 한 번에 출하를 하게 되니 가끔 판로가 문제 될 때도 많아요. 그럴 때는 페이스 북이나 블로그에 올려 팔기도 하는데, 오로지 농사만 지어서는 어려워 장이나 김치도 만들어 팔아요.”

이제는 서울사람이 아니라 농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부가 존경스러워보였다. 풍경을 보는 일처럼 농촌이 여유롭지는 않다. 늘 일이 밀려 있고 일에 지쳐 쓰러져 잠드는 일이 많은 이들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는 누구에게 받아야하는지 묻고 싶다.

북산교회 아래 통나무집에 사는 할아버지 집 뒷산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흔적이 많았다. 며느리인 홍씨는 아버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뒷산에서 군화와 군모도 발견이 되었고요, 뒷산 뿐 아니라 오항리 주변 마을 곳곳에서 유골들도 나왔대요. 이 마을에서 아주 치열하게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살아남은 이가 얼마 안 될 정도로 치열했는데 휴전하고도 공산치하에 있다가 한참 후에 수복이 된 거래요.”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방문을 했지만 모두 밭에 일을 나갔다고 했다. 길가에는 들깨를 심는 마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면사무소를 지나 배터까지 이르는 마을길에는 매미소리만 들려왔다. 길가에 오빛뜰 체험장이 황토집으로 숙박시설을 갖추고 몇몇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놀러온 듯했다. 체험장 길 건너에는 끌어들인 계곡물로 작은 어린이 수영장을 채우고 있었다. 장재골에서 시작되는 오항천은 수영장옆을 지나 소양호로 흘러들어간다.

오빛뜰 체험장을 지나면 오항리 배터와 내평리로 가는 갈림길이다. 갈림길을 지나 왼쪽으로 새무골 농가 몇 채가 보이고 하우스 대에 호박꽃이 만발했다. 새무골은 샘골이라 하는데, 좋은 샘이 있는 마을이란다. 새무골 끝자락에는 윤보영(62) 씨가 산다. ‘새무골 이야기’라는 다음(Daum) 블로그를 통해 부부는 시골에서 사는 소소한 아름다운 행복을 전하고 있다. 낚시가 좋아서 오항리를 알게 되어 새무골 초입에 당시 5천평을 살 수 있는 금액으로 텃밭도 없이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사고는 매주 서울에서 내려오곤 했다.

“그래도 그 행복감은 돈에 비할 수는 없어요. 군불을 때도 너무 추워서 방안에 텐트를 치고 지낸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지금 이 집을 직접 설계하고 정성을 들여 지었지요. 원래 여기는 다랑이논이었는데, 이 골짜기는 샘이 마르지 않는 곳이래요. 마당 가운데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어도 자연히 물이 차 있어 운치가 있어요.”

이 마을은 이웃 간에도 정이 돈독해 반상회에도 꼬박꼬박 나간다고 한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하는데, 그간의 마을소식도 접하며 사는 얘기를 나누고 회비를 모아 동네 어르신들에게 여행을 보내드리고 경조사도 챙긴다. 마을에 방문하던 날은 반상회를 하는 날이라고 한다. 윤보영씨 아내가 모임사진을 보내왔다.

윤씨네 정원을 보면 부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을 다했는지 발끝마다, 시선마다 살갑다. 이웃집 모나미님네 정원에서 꽃을 많이 얻어다 심었다고 해서 그 집을 따라 나섰다.

오항리 길이 끝나가는 지점에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솔바람카페 위쪽에 모나미(카페 닉네임) 씨 집이 있다. 남편은 손박사로 통하는데 전직 교수로 음악과 오페라를 좋아하셔서 방문객에게도 오페라를 보여주곤 한다. 나 역시 8년 전 이 댁에 방문했을 때 돈 주앙을 본적이 있다. 아내인 모나미 씨는 ‘한국종자나눔회’라는 다음 카페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한 지가 오래되었다. 마당에는 하우스까지 갖추고 월동이 안 되는 식물을 관리하고, 정원 가운데 쪽에는 월동하는 숙근 위주의 식물을 심고 꽃밭 가장자리로는 일년초를 주로 심는다.

“집 부근 마을길을 야생화 길로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장마 지나고 올라오는 풀에는 당할 재간이 없어요. 혼자서 하려니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서 1년하고는 그만두었어요.”

간혹 소문을 듣고 꽃구경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오항리에는 이상원화백이 살고, 김진묵 음악가도 살고 있다. 춘천사람들 조합원이 되기로 한 준미농장 부부와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박백광 씨도 시내를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오항리는 더 이상 먼 오지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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