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읍사무소, 우체국, 한샘고, 춘성중, 천전초, 도서관, 보건지소, 농업기술센터, 경찰박물관, 장터 등 신북면의 주요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 율문리이다.

이곳은 소양5교 북단에 있는 마을로서 앞으로는 소양강이 흐르고, 넓은 들이 비옥해 고대도시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자 산이 없는 평야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율대리, 문정리, 천구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율대리의 ‘율(栗)’자와 문정리의 ‘문(文)’자를 따서 율문리라 부르게 되었다.

소양5교 신북사거리에는 농기구도 파는 제법 큰 오래된 철물점과 중화요리집 옆으로 솔지피아노학원이 있다. 빨간 우체통이 서있는 이곳은 류기택 시인의 집이다. 오랜 세월 아내가 운영했던 피아노학원은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춘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소품을 전시하고 위탁판매도 할 계획이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마당에는 30년 된 수수꽃다리 아래 작은 테이블이 있고, 분재로 키우던 단풍나무가 야무지게 자리 잡은 지도 20년이 되었다. 5월의 라일락 향기가 없어도 시인이 말아준 꽃냄새 같은 국수를 먹었다. 고목의 나뭇잎 틈바구니를 비집고 햇살 고명으로 내려앉은 비빔국수와 블루베리, 바나나, 꿀을 넣고 갈아서 만든 음료는 허기진 나그네에게 감동이었다. 눈 오는 날 막걸리 한 잔에 뜨거운 소면을 먹자고 약속했다.

“춘천에 왔다가 잘 곳이 마땅하지 않고, 오가다 들리는 지인들에게 차 한 잔도 좋고, 국수라도 말아주며 놀고 싶었어요. 덤으로 춘천의 작가들도 알리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소품도 팔아주고요.”

그 특유의 순박하고 환한 웃음은 후식이었다. 마실 첫걸음부터 넉넉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율문리를 들여다보았다.

위성지도로 살펴본 율문리는 바둑판 같은 농지가 대부분이었다. 푸른 논밭 사이를 지나며 자전거를 타는 마을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사랑교를 건너 사랑말길을 지나다 만난 청춘 남녀의 자전거가 예쁘게 눈에 들어온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앞 친구의 어깨에 가만히 올린 손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래서 사랑말인가 싶었다.

춘천(春川) 박씨의 시조인 박항(朴恒)이 지은 집에 멋진 사랑채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박항의 집터 부근 마을을 사랑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에게 들었는데 집이 아주 으리으리했대요. 지금은 춘천 박씨들이 연산골에 많이 사는데 사랑채에 늘 손님이 많았다네요. 옛날에 몽고족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도 포로로 끌려갔다고 해요.”

박항은 고려 후기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한다.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몽고군이 춘천을 함락시킬 때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으로 끌려갔다. 박항은 어머니를 두 번이나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박항은 문장이 좋고 마음이 너그러워 사람들을 잘 접대하고 공무에도 부지런하여 수령으로도 인정받았다고 한다.

사랑말 2길 2층짜리 마을회관은 노인정을 새로 지으면서 마을회관을 노인정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이전의 마을회관은 월세를 주어 마을수입으로 짭짤하다. 세를 준 마을회관 바로 앞에는 지난해 새로 지은 농가주택이 산뜻하고 온화했다. 마당에는 분재와 꽃나무가 잘 가꾸어져 주인장이 궁금했는데 시각장애인이라는 데 놀랐다.

“엄마 등에 업혀 있을 때 홍역을 앓았는데 각막손상이 왔던 모양이래요. 난리 때인데 무슨 병원이나 있기를 해? 부모님도 몰랐지. 학교 갔는데 맨 앞에 앉아도 글씨가 안 보여. 그러니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이었지. 그래도 배가 고프니까 학교를 가. 점심때 미군이 준 우유가루를 타주는데 아주 꿀맛이지. 난리 때 아마 학교가 불에 탔나? 그랬을 거야. 솔밭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하다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의자를 하나씩 다 들고 개미들 먹이 물고 줄지어 가듯이 신작로를 걸어 학교 집기를 옮겼다우.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춘성중학교에 입학했는데 1교시가 끝나면 월사금을 가져오라고 해. 아침에 없는 돈이 그때 가면 있겠어? 그래 눈도 잘 안 보이고 돈도 없고 게다가 내 아래 동생이 죽어서 12살 차이로 동생이 생기고 또 금방 쌍둥이 동생이 생긴 거야. 엄마가 둘을 못 업으니 하나는 내가 없고 바로 아래 동생은 데리고 다니며 봐줘야 했지. 애들을 짚새기로 말거나 돼지 오줌보로 공 만들어 차고 놀면 난 동생 업고 구경이나 했지. 나도 참 고생 많이 했어.”

사진 찍는다고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나왔는데 할아버지 별명이 젊었을 때는 신성일, 중년에는 노주현이라고 했다. 들녘이 훤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온화하고 밝은 표정으로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는 두어 시간이나 자리를 못 뜨게 했다. 집에는 땅이 별로 없어 돈 벌러 서울에 나가보기도 했지만 험악한 일이 맞지 않아 고향에 와서 여름에는 농사짓고 농한기에는 영월에 있는 친척이 운영하는 큰 잡화점에서 잡일을 거들어 돈을 벌었다.

“70년대 경운기가 처음 나왔을 때 230만원이었어. 130만원은 대출을 받아서 우리 동네 논밭은 다 갈아서 그해 빚을 다 갚았어. 우리 마을에는 우시장이 있었어. 철원, 양구, 화천에서 소를 끌고 와서 여기서 거래를 했지. 아버지가 안계시고 어려서 소를 볼 줄 모르니 친구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70만원을 주고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46마리까지 불렸지. 그때 화투를 해서 집 날린 이도 많아. 난 술은 좀 해도 화투에는 절대 손을 안 댔어. 그게 돈이 되어 애들 대학 다 가르치고 땅도 사고, 30년 전에 사랑골 위쪽에 집도 지었지. 그때 우리 동네에서 다섯 번째로 좋은 집이었어. 아직도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농사를 짓고 있지.”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있던 샘밭 우시장에서 거래했고, 할아버지는 남춘천역 부근 우시장에서 소를 사고팔았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우시장은 옮겨졌고 율문리에 가축시장이란 이름으로 2004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가축시장 앞에 사는 이에게 물었더니 요즘은 정기적으로 장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춘천의 대표 장이었던 샘밭장은 6·25전쟁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샘밭 장터가 2004년 부활되어 4일, 9일 오일장이 열리고 있다. 특히 주변 농가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은 저렴하고 싱싱하다. 말 한마디에 덤이 있는 시골장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출출하면 노점에서 사먹는 재미도 있다. 다 팔아도 몇 만 원 안 되는 채소 몇 가지를 늘어놓고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여유로운 할머니는 사람 구경하러 나오신단다.

장터 옆으로는 강원경찰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경찰차와 오토바이가 체험용으로 세워져있고 내부 전시실에는 조선시대 포도청으로부터 지금까지 경찰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유물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휴관일은 월요일이고 관람시간은 9:30~17:00이다.

칠전동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는 이 동네 전원주택 부지를 알아보러 왔다가 들렸다고 한다.

“이 동네가 시내와도 멀지 않고 편의시설도 잘 갖추진 시골이라서 땅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가끔 밥 먹으로 이쪽으로 오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시골에서 맘껏 뛰어 놀고 텃밭도 가꾸면서 살고 싶어요.”

커피 한 잔을 사들고 강변길로 향했다. 소양댐까지 자전거 투어에 나선 사람들이 지나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근처 강변은 겨울철 상고대가 유명하다. 물안개 신비롭고 새벽공기 매서울수록 하얗고 아름다운 얼음꽃이 핀다.

작은 집 짓고 마당엔 꽃과 푸성귀를 심어두고 빨랫줄에 하얀 이불 날리는 풍경 속에서 툇마루에서 앉아 바느질하고, 해지는 강가를 거니는 상상을 하며 돌아왔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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