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대 1회 졸업생이 춘천에 생존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해야겠다 싶어 연락처를 확인해 전화를 했다. 조용한 노구의 목소리를 예상했는데, 활기찬 울림과 공손한 듯 유쾌한 말투에 반전을 맞았다. 궁금증을 그득 머금고 약속일에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신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 들었는데 상당히 젊다고 생각하던 순간, “우리 아버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에 순간 당황하며 주인공과 마주했다. 춘천교대 1회 졸업생인 1922년생 안홍모(96) 씨였다.

춘천교대의 처음 명칭은 ‘관립춘천사범학교’였다. 1939년 첫 입학생은 100명이었다. 한국인 70명과 일본인 30명이었는데, 그 중 강원도 출신은 30명이었다. 일본인 졸업생 중 곤로 히로시라는 사람이 후쿠오카에 생존해 있어 춘천교대에서 5년 전에 그를 한국에 초대했다. 한국인이 일본에 방문하면 호의를 다해 맞아주고 안내를 해주어 춘천교대에서 공식적으로 초대해 공로패를 증정했다. 여비와 기타 비용은 동기였던 안씨가 기꺼이 도맡았다. 수십 년 만에 모교를 방문한 곤로 씨도 반가움과 감동을 표했다고 한다. 안씨보다 두 살 아래인 그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전언이다.

70명 한국인 졸업생 중 대다수가 서울에 살고 있다. 한동안 지속되던 1회 졸업생 모임은 구성원들이 연로해지면서 이제는 모이지 못하고 서로 연락도 뜸해졌다. 당시는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하면 사범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사범학교는 5년제였고 안씨가 입학할 당시 경쟁률은 약 6 대 1 정도였다. 일반 중학교는 4년제였다가 자유당 시절부터 3년제 중학교와 사범학교로 학제가 바뀌었다. 그 시절 관립학교는 학비가 면제였고 생활비도 지급했다. 기숙사비 정도만 학생이 감당했다.

일제강점시기였던 그때는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근무지를 배정 받았다. 입학생 중 20명은 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유학가기 위한 자퇴, 사망 그리고 반일사상자 퇴학이 이유였다. 졸업생 80명 중 강원도에 배장된 인원은 20명이었다. 안씨는 1944년 졸업과 함께 고향인 삼척 동국민학교에 발령됐다.
 

“내가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고향에는 국민학교가 없었어. 100리를 유학해 동해시 북평국민학교의 18회 졸업생이 되었지. 나는 6년 개근을 했고 사범학교 5년도 개근을 했어.”

성실을 가훈으로 삼는 그에게 개근은 내세우고 싶은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범학교 출신 교사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임시 교원양성소에서 1~2년 교육을 시켜 교사로 발령을 냈다. 정규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안씨가 삼척 정라국민학교 교감으로 재직할 때 학부형 한 사람이 찾아왔다. 해방 전에 춘천국민학교에 근무하던 중 이북으로 갔다가 한국전쟁 때 남하해 정라진에 정착했는데, 아이가 정라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돼 인사를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후에 인제군 총무과장이 되었다. 인제교육청이 처음 생길 당시는 군수가 교육감을 대리하고 총무과장이 교육감을 대행해 실무를 담당했다. 남한의 교육실정에 어두웠던 총무과장은 앞서의 인연으로 안씨를 인제교육청 초대 장학사로 차출했다.

“1970년대 초까지 강원도교육청에서 장학관과 교육과장으로 12년 정도 머물다 춘천시교육청 교육장으로 6년을 더 근무하면서 영서사람이 된 거지.”

홍천 남면 양덕중·상업고등학교 재직시절을 더듬는다. 당시 양덕상고는 개교 2년차였고 첫 졸업생을 안씨가 배출했다. 언제나 처음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간동중·고등학교, 홍천교육청을 거쳐 사북 고한고등학교를 끝으로 다시 춘천으로 들어왔다. 3남 1녀와 아내가 둥지를 틀고 있던 곳이 춘천이었기 때문이다. 춘천시교육청 재직 시 남춘천초등학교는 있는데 동춘천 쪽에 학교가 없어 건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학교를 세워 ‘동춘천초등학교’로 명명했다. 학교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부인이 3년 전 세상을 떠나고 그는 현재 장남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고맙게도 며느리가 연로하신 아버님을 홀로 둘 수 없다며 서울살이를 접고 기꺼이 춘천으로 내려와 주었다. 그런 며느리에 대해 각별한 신뢰와 애정을 가진 듯 보였다. 지금보다 세련되지 못하고 결핍이 당연한 시대였어도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요즘 교사들을 앞섰다고 자부하는 그다.

“현대는 사도정신이 다소 약해진 거 같아. 나는 전교조를 반대해. 나는 학생들을 최고로 존중했지. 학생들에게 결코 매를 사용한 적이 없어. 군국주의 여파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쓰는 교사들이 많기도 했지. 군대식 교육이 학교현장에서 재연되면 안 되는 거지. 모르니까 학생인 거야. 모르는 것은 가르치면 되는 것이야.”

가훈을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교단에 서서 제자들을 바라보는 교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훈은 ‘경애의 정신, 성실한 생활, 건강한 가정’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가장 우선이라는 그는 구성원 개개인의 건강이 전체를 건강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단언한다. 집에서도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은 아버지였노라고 역시나 연세 지긋한 아드님이 귀띔을 한다.

행정전문 교육자로서 그는 오늘날의 교육행정에 대해 아이들을 노예화시키는 교육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사상적으로 진보 교육감이 대세인 요즘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교육감이라면 적어도 교장까지 역임하고 모든 과정을 겪어봐야 교육현실을 골고루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교인 춘천교대를 지척에 두고 있어 가끔 총장을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보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에 무관심한 것을 발견한

“내가 춘천시교육장으로 있을 때인 1972년 즈음인 것 같아. 식목일을 기념해서 춘천교대 뒷산에 잣나무 100그루를 심어 주었거든. 그 후 40년이 흘러 잣나무가 아름드리 자라고 있을 터인데 총장은 학교 뒷동산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존재하는지 모르고 있더군. 학교에 관심이 없다고밖에 생각이 안 드는 거지. 씁쓸하더라고. 한 번 둘러보라고만 말하고 돌아왔지. 학교에 애정을 가져야 해.”

그는 퇴직 후 유봉여고 관선이사장으로 4년간 근무하고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주축이 된 ‘지역사회 교육운동 좋은학교 만들기’에 역할을 보탰다. 뼛속까지 교육자인 탓이라고 말한다.

춘천에 대한 단상도 슬쩍 꺼내놓는다. 춘천은 90%가 공무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근무지를 따라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지역적 전통이 생기지 못했다는 것. 춘천의 정체성이라 할 만한 색깔이 없다는 아쉬움 섞인 비판이었다. 공무원 집단이 절대적 주민이라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다. 토착민들조차 모호한 정체성으로 인해 전통이 없고 애향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강릉이나 원주만 해도 토착민이 많다. 춘천이 수도권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도 작용했으리라 추측해본다. 호수와 어우러진 자연경관과 수도권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시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생각이 현재 시민사회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심이 애정의 시작이라는 그의 지론을 실천하는 삶이 그의 꼿꼿함의 원동력인가 싶어진다.

좀 더 여력이 있다면 소양강 주변 자연보호운동 같은 봉사활동을 더 하고 싶었다는 그다. 그의 바람에서 지역민들의 애향심 부족을 안타까워하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과 걷기운동으로 자기관리에 엄격하면서도 더불어 사는 소통의 중요성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그다. 교직을 비롯한 여러 직종의 퇴직자들이 모여 ‘월목회’를 조직해 춘천의 산야를 함께 누비며 소통하고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죽으면 고향 삼척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어 춘천에 묻히기로 했다는 그가 춘천사람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메세지다. “윗사람 공경하고 아랫사람 존중하며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임희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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