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 너무 멀어 한치고개 넘어 백양리 통해 가평을 오간 사람들

춘천이 너무 멀어 한치고개 넘어 백양리 통해 가평을 오간 사람들

 

소주터널을 지난다. 충의대교 앞 오른쪽 길, 가정리다. 올여름 최고 기온 36℃까지 치솟은 날의 마실탐방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나니 따가운 햇살이 겁나지 않는다. 강의 유유함은 곧 수상스키의 물보라 부서지는 시원함으로 생기가 넘친다.

고요한 시골마을, 강원학생교육원 앞 강변에 이르자 ‘골든 멍키’라는 수상레저시설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몇 년에 한 번 쯤 마을에 들어온 가설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화려한 시설물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실 신기할 것도 없는데 나이가 너무 든 탓인가 싶다. 최신 수상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과 노출에 뒤섞인 산뜻한 차림새들이 새롭기까지 하다.

 

 

강에 들어가 멋지게 낚시를 던지는 이와 그 배경에 서있는 커다란 나무는 나를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으로 이끌었다. 수차례 지나왔던 길이었지만 처음 만나는 풍광이었다. 강변에서 강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동그란 호기심의 눈이 가늘고 부드러워졌다. 어린 시절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흘러왔던 그림들이 밀려가는 물결 사이로 지나갔다. 잡을 수 없는 이 강물처럼….
오래 서 있자니 주르륵 빠르게 흐르는 땀방울에 가벼운 현기증도 있어서 자리를 옮겼다.

가정천이 흐르는 샛강에는 버들치가 떼로 몰려다녔다. 물고기 떼를 한참 좇다가 대곡교를 건너니 백일홍이 늘어선 농가주택의 마당에 세월의 흔적이 뿌옇게 앉은 2층 높이의 오래된 정자가 있었다. 이 농가주택에는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산다.

“저 정자는 아들이 지은 거야. 건축 일을 하거든. 오늘도 일을 나갔지. 애들이 다섯이나 되니 많이 벌어야지. 우리 며느리는 효부야.”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수박을 들고 왔다. 수줍은 손녀는 가정초등학교가 2009년 폐교되는 바람에 남산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유장상(82) 씨는 이곳 덕골에서 나고 자랐다. 해방을 맞던 해인 1945년, 그는 가정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8월 15일에 광복을 해서 그때는 학기가 9월에 시작하고 7월에 졸업을 했지. 그건 잘 모를 거야. 해방하고 몇 년을 그리했으니까. 전쟁 끝나고부터는 다시 3월에 개학을 하게 된 거지. 백범 김구 선생님은 다 알지? 1945년 귀국해서 여기 가정리를 방문하셨지. 가정초등학교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연설을 하셨는데 나도 있었어. 어려서 잘 몰랐어도 그때 본 모습은 생각이 나. 그리고 난 고흥류씨인데 의병이 났을 때 집집마다 돈을 걷어서 내고 동네사람들이 의병들을 많이 도운 의로운 동네라구.”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아침에 밥 먹으면 점심은 거르고 저녁에 죽을 먹을 정도로 가난해서 학업을 잇지 못하고 농사를 지었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도 잃지 않은 애향심이 분명해 보인다. 춘천은 70리, 가평은 30리니 당시에는 사람이나 다니는 소로를 걸어서 가평장을 다녔다. 60년대에는 발동선이 생겨서 좀 빨라졌다고 한다. 아이들의 엄마가 집안 일로 분주해 할아버지 집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의 냇가에서는 젊은 부부와 아이가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외할머니 댁에 놀러온 거예요.”

다섯 살 꼬마는 포즈를 취하고 시원하다며 들어와 함께 놀자고 권한다. 가족이 노는 모습이 하도 예뻐서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아이와 귀여운 대화를 잠시 나누고 헤어지려니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마음을 냇가에 두고 근처 류인석 유적지에 들렸다. 유적지에는 의암묘역과 의암기념관, 복원된 의암의 생가, 의병학교가 있다. 기념관 옆으로는 김구 선생이 의암묘역을 참배하며 읽었다는 고유문을 새긴 비가 있었다. 의암 류인석 의병장은 1842년 가정리 출신으로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맞서 그는 의병을 조직해 봉기했다. 1910년 국권피탈 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1915년 중국에서 순국했다. 순국한 지 20년이 지나 이곳에 그의 묘역이 조성됐다.

가정리는 충의(忠義)의 마을이다. 이곳뿐 아니라 가정중학교 뒤, 여의내골에서 여성의병장 윤희순은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군자금을 모아 놋쇠와 구리를 구입해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했다.

충효로 길가에는 활짝 핀 무궁화들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다. 의병주를 알리는 영농조합법인 의병제주보존회 입간판이 있다. 이 의병주는 류인석 선생 가문에서 빚어오던 젯술(祭酒)로 전통주 비법을 물려받아 마을 아주머니들이 옛 방식 그대로 직접 술을 빚는다. ‘춘천 의병’ 정신을 담은 전통주의 가격은 1만5천원이다. 지난 초봄에 인근 편의점에서 의병주를 사서 맛도 보았다. 부드럽고 향도 좋았다. 제주로도 선물로도 좋을 듯했다.

마을 농로들을 다니다보니 한화제약 앞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주민들이 만들었다. 아녀자들도 동원돼 삼태기와 지게에 흙을 날랐다고 한다. 경비실에서 휴일에 근무하는 유아무개(62) 씨를 만났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사무실은 천국이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3교대에서 2교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경비실의 또 다른 근무자와 청소를 담당하는 분도 유씨와 가정초등학교 동창이다. 한화 제약에 근로자는 100여명 정도 된다. 공장노동자는 대부분 춘천출신이고, 연구직과 임원직은 대부분 본사에서 왔다고 한다.

“젊어서는 다른 일을 하며 떨어져 살면서 일 년에 몇 번씩은 봤지요. 이제 나이 들어 다시 만난 거죠. 아무래도 친구끼리 일을 하니 좋지요. 어릴 적에는 다 검정 고무신이었는데 엄마 따라 콩이나 밤을 팔러 가평장엘 가요. 여비를 아끼려고 근처 선착장에서 타지 않고 방하리 선착장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다 팔아 돈이 좀 되면 운동화라도 얻어 신으면 다음날 학교엘 가서 친구들 앞에서 으스대는 거지요.”

기념사진 찍어 준다니 쑥스러워하며 작은 저수지 앞 화단에서 웃어주었다. 시골에 이런 일자리라도 노후에 살뜰한 보탬이 되겠다 싶었다.

가정리 사람들은 춘천이 너무 멀어 절골에서 한치고개를 넘어 백양리에서 가평으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새벽밥 먹고 나서면 장을 보고 초저녁별을 보며 귀가했다. 그래서 가정리와 백양리 사람들끼리는 인연이 닿아 결혼 하는 일이 많아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불볕더위에는 드라이브도 강변을 지나면 좀 낫다. 방하리에서 보는 자라섬 주변의 일몰풍경은 언제 봐도 감동이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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