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에 이르러 겸병이 더욱 심해 간흉한 무리가 주군(州郡)과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고…누세에 걸쳐 심은 뽕나무와 집까지 모두 빼앗아 우리 무고한 백성들이 사방에 흩어져버립니다.”

《고려사》 우왕(禑王) 조(條)에 나오는 말이다. 고려 말 대토지 겸병이 극심했다. 산과 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할 정도니 권문세족들이 얼마나 많은 땅을 소유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권문세족들이 권세를 이용해 토지를 지속적으로 강탈한 결과 양민들은 땅에서 유리돼 노비가 되거나 유민이 되었다. 양민의 수가 줄어 조세수입이 줄자 국가재정에도 위기가 닥쳤다. 이는 결국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과거 농경시대 부의 핵심은 단연 토지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토지는 가장 중요한 부의 척도 중 하나다. 과거처럼 땅에 농사를 짓는 대신 건물을 짓는 것이 다를 뿐이다. 대기업은 땅을 사들여 빌딩을 짓고 아파트를 지어 황금을 쌓는다. 대기업뿐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땅 가진 사람들의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까.

지난 6월 7일 오전 8시 20분.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거리에서 궁중족발 사장인 김아무개가 건물주 이아무개에게 망치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이씨는 손등과 어깨를 다쳤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검찰은 김씨에게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김씨는 이씨에게 왜 폭력을 휘둘렀을까?

김씨는 2009년 5월 보증금 3천만원에 월 임대료 263만원으로 1년간 상가임대차 계약을 했다. 이후 2015년 5월 임대료는 297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건물을 인수한 이씨가 건물 리모델링 명목으로 일시적 퇴거를 요구하면서 공사 이후 재계약 조건으로 보증금 1억원에 월 임대료 1천200만원을 요구했다. 보증금은 세 배, 월 임대료는 네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김씨는 법정에서 살해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부처님이 현신하지 않는 이상 살해의도가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도 1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 사방을 둘러봐도 ‘평등’과 ‘공정’과 ‘정의’는 없다.

건물주에 목숨을 저당 잡힌 자영업자들은 거꾸로 힘없는 직원과 ‘알바’들을 옥죈다. 내년 최저시급이 820원 오른다고 아우성이다. 주 40시간 노동으로 계산해도 월 17만원 정도다. 점주들은 힘센 건물주에는 대항하지 못하고 애꿎은 직원들 최저시급 인상만 탓한다. 그야말로 먹고 먹히는 정글의 세계다. 여전히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고, 결과는 정의롭지 않다.
‘헬조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흥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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