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변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원평리를 찾았다. 춘천댐이 건설돼 인공호수인 춘천호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수몰돼 마평천 하류 일대로 이주를 해서 그런지 마을의 집들은 오래된 집이 없었다. 마을길은 온통 꽃길이다. 걸어서 두어 시간이면 중심마을을 다 둘러볼 정도로 작은 마을인데, 집집마다 꽃밭이 예쁘고 논두렁과 밭두렁에도 해바라기, 백일홍이 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다.

원평리 마을에서 보이는 북한강. 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로 이끈다.

5번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마평뜰에 서 있는 38선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삼팔선의 봄’이란 민박집 간판이다. 38선 표지는 1970년대에 말고개 입구에 나무로 세워져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2004년 마평뜰에 현재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1945년경 이 마을의 일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 25일, 국군의 38선 경계진지 전투로 화천에서 가평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공격을 저지한 고시락 전투가 치열했고, 물속에 잠긴 모진교 전투는 춘천대첩의 시작으로 한국전쟁 초기전투 중 유일하게 국군이 승리한 전투였다고 한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면서 수복돼 남한 땅으로 편입됐다.

“우리 마을을 38선 마을이라고 부르는데, 한 집에서도 시어머니 방은 북쪽, 며느리방은 남쪽으로 갈라진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고 해요. 전쟁으로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춘천댐이 생기고 마을의 역사는 고스란히 물에 잠기고 농토도 줄어 원평리 농사 규모가 줄고 지속적으로 위축되고 있었죠. 대신 낚시터가 생기거나 강변에 민박집도 생기면서 우리 마을은 토착민이 10%가 안 됩니다.”

영농조합 원평 팜스테이 부회장 김미영 씨.

마을에서 꽃길을 가꾸고 있던 김미영(50) 씨를 만났다. 영농조합법인 원평팜스테이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녀는 당차고 솔직하고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영농조합 회장인 남편과 함께 2만평의 친환경 농사를 짓는 부부는 꽃모종을 앙묘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하고 있다.

“어제도 재외 동포 3~4세 청소년들이 100여명 체험을 다녀갔어요. 서로 손도 잘 맞고 300~400명도 거뜬히 해내는 지라 100명쯤은 이제 쉬워요.”

해바라기와 팜스테이 전경.

원평리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 이곳에서 24년째 농사를 짓고 팜스테이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이 마을은 2002년 팜스테이를 시작했다. 전국 김치 담기 좋은 마을 10선에 들었고, 일본 아사히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할 정도로 김치체험은 유명하다. 그 외에도 문화체험, 농사체험 등 다양한 체험과 휴양을 위해 한 해 동안 원평마을을 찾는 체험객은 대략 1만 명쯤 된다. 상근자 4명을 두고 20여 가구 농가도 농촌체험에 참여하고 있다.

“외지인이 많은 마을이라 저마다 개성도 강하지만 장점도 많아요. 저희 팜스테이가 주축이 되어 소통의 장도 만들고 마을의 농산물을 위탁판매도 하고 있어요. 저희는 친환경 인증을 받은 안전한 농산물로 정직하게 공급하니 한 번 고객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어요. 이러한 노력은 한 달에 한 번 저희 조합회원들 모두 모여 한솥밥을 나누어 먹으며 토의하고 공감대를 만들어 가능한 일이기도 해요. 마을 꽃길 조성도 저희가 주가 되어 하고 있어요. 방문객의 첫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우리 마을로 귀농하신 분 중에는 마을 꽃길에 반하셨던 분도 있어요.”

마평천 골짜기를 사지골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사자사(獅子寺)가 있던 곳이다. 지금의 탄약부대 뒤쪽으로 《춘주지》에 따르면 소나 말이 못 다닐 정도로 험한 곳에 있어 병자호란 때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을 피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절터에는 기와편과 자기편이 발견되었고 축대로 보이는 흔적도 있다고 한다. 원평리 남쪽에 있는 고시락 고개를 넘으면 지암리인데 한국전쟁 당시 지암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마평천 골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도, 마을이 물속에 잠기는 아픔과 슬픔도 오래 전 강에 흘려보냈을 것이다. 지금 원평리에는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평루 중식당.

마을 초입에 있는 마평루라는 중식당의 주인장은 10여년을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주방일을 하고 남편은 서빙과 계산일을 맡고, 1천여 평의 농사를 지어 식당에서 사용한다.

“옛날에 한양에서 장수들이 말을 많이 매고 유숙을 했다고 해서 여기를 마평이라 불렀대요. 그래서 마평루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우리는 고춧가루를 사는 일이 없어요. 인근 부대가 많아 평일 낮에는 군인들이 많이 오는데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예요.”

마평루 건너편에는 도자기 작가 이해일 씨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어게인 11월’이 있다. 예술가의 집답게 마당 구석구석의 조형물들과 도자기가 멋스럽고 마당 앞으로 흐르는 강과 고목들의 풍경이 아늑함을 더했다.

이해일 씨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 ‘어게인 11월’.

“오래 전에 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카페 이름이 ‘11월’이었어요. 11월만 되면 찾아오는 단골도 있었어요. 땅을 보러 많이 다녔는데 이곳이 편안하고 맘에 쏙 들었어요. 좀 무리가 되었지만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질 않더라구요.”

조용한 부부의 미소에 더 편안한 이곳은 문을 연 지가 얼마 안 되어 아직은 적자운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으며 밤엔 마을길을 걸었다. 개구리 소리 가득한 곳을 지나 마평천가로 가는 밤마실 하늘에 북두칠성이 또렷한 밤하늘에는 은하수도 흘렀다. 아침에 이 작가가 내려주는 커피를 들고 아침햇살 내리는 강을 바라보는 여유도 좋고 텃밭과 꽃밭을 손보는 부부의 모습을 보며 전원생활의 행복감을 대리만족했다.

마평천에서 휴가를 즐기는 가족.

춘천호와 마평천은 이 마을의 가장 큰 매력이다. 고요한 강마을 사람들은 또한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마을과 자연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우렁이 농법으로 논농사를 짓고 친환경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논과 호수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평화로운 원평리 주변에는 화악산과 용화산도 가까이 있어 등산하기에 좋고, 원평계곡 주변 산책코스도 좋다. 사계절 낚시와 하얗게 눈 덮인 강에서 썰매를 타고 얼음 축구를 하고 빙어낚시도 즐길 수 있다.

은빛 설원의 광활한 강을 걸어본 일이 있는가? 뺨에 스치는 바람에 턱이 굳어가도 머릿속은 서늘하게 비워지며 가슴은 뜨거워지는 순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유난히도 끓어올라 식을 줄 모르는 여름의 폭력 앞에 겨울 강을 상상하며 지나는 길에는 밤 대추가 부피를 키우고 있었고 보랏빛 쑥부쟁이도 곧 봉오리를 터트릴 모양이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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