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시인 정순태 씨의 ‘꿈길’

서면 오월리에서 10시에 진행하는 한글수업을 들으러 춘천교육문화관으로 가려면 아침 일곱 시 버스를 타야 한다. 그 버스를 타고 ‘한글학교’에 도착해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글수업이 시작된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는 시간이 길더라도 그저 배운다는 행복감에 빠져 먼 거리를 다니는 고단함도 잊는다는 정순태(76) 씨. 한글을 배우고 싶은 열정은 일흔이 넘도록 이어져 왔지만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따라주지 않았다. 시내에 나와 약사명동주민센터를 찾아 배울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니 춘천교육문화관 수업을 소개시켜주었다.

춘천시청 로비에서 시화전에 걸린 시들을 읽어보는 정순태 씨.

“그동안 글 배울 시간이 어디 있었겠나. 여덟 살 때 전쟁이 나서 살던 곳 버리고 온가족이 피난길에 올라 생계유지하기 바빴지. 결혼하고도 야채를 떼어 리어카에 싣고 시내에 나가 장사해서 아이들 먹이고 가르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늙었어.”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은 아팠다. 위 질환 수술 후유증으로 집밖 생활이 어려운 남편 병수발을 50년 넘게 해왔다.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어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지난해 남편은 “이 외딴곳에 혼자 남겨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먼길을 앞서 갔다.

54년째 한 집에 산다. 정씨가 나이 드는 만큼 집도 낡아 버렸지만 모아둔 돈이 없어 집수리는 언감생심이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우여곡절 키운 네 자녀가 있지만 둘은 아프고 둘은 각자 살기에도 바빠 손 벌리기도 어렵다. 기관에서는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작은 화장실 하나 짓는 것에도 도움주길 꺼려한다. 씻을 공간이 없어 마을회간까지 걸어가 씻는데 여름은 그렇다 해도 겨울은 이제 다니기에 힘이 부친다.

“결혼하면서 지은 집인데 토지는 아주오래 전 다른 사람 이름으로 넘어가 20년 전에 지상권만 있는 집으로 등기를 해놓았지. 그래서 재건축도 불가능하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원하지 않고 오로지 화장실과 씻을 수 있는 공간만 생기면 원이 없겠어.”

글을 알던 남편이 없으니 부조할 때 봉투에 이름이나 쓰자고 한글을 배웠다. 글을 같이 배우는 선생님과 할머니들도 아주 열심히 하는 우등생이라며 칭찬일색이다. 이제 속마음을 내어놓는 시나 글을 쓸 수 있는 정도가 됐지만 지난 세월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고 눈물만 날 것 같아 쓰지 않는다. 단지 꿈에나 그릴 수 있는, 어린 시절 철원 넘어 휴전선 근처에 살던 옛 고향이나 ‘꿈길’이라는 제목으로 한자한자 남겨본다.

유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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