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마실 - 사북면 가일리(佳日里)] 북한강변 적막한 아름다움에 묻혀 사는 사람들
[스무 번째 마실 - 사북면 가일리(佳日里)] 북한강변 적막한 아름다움에 묻혀 사는 사람들
  • 김예진 시민기자
  • 승인 2018.08.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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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스스로 고립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이 고요한 강이 흐르고, 짙푸른 강물 위로 백로의 날갯짓을 따라 시선이 멈추는 곳마다 가슴 출렁이는 풍경이라면 더욱 그러하리라. 407번 국도를 따라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고탄리에 있는 솔다원 나눔터와 정자가 있는 삼거리를 만난다. 정자를 끼고 좌측 마을길이 송암리를 거쳐 가일리로 가는 길이다.

송암리의 정겨운 밭들을 지나 산고개가 시작되자 칡덩굴이 길까지 먹어 삼킬 듯했고 전봇대마다 칡기둥을 이루었다. 가일고개는 그동안 다녔던 어느 고개보다도 가파르다. 구불구불 힘겨운 고개를 넘어 내려오니 가일리를 알리는 표지석과 이내 알록달록 백일홍을 가득 심은 마을 입구가 드러났다. 내리막길 왼편 스레트 지붕을 얹은 외딴 집, 흙집 앞 도로변에 뿌리를 내린 댑싸리, 어린 연둣빛 밤송이를 떨어뜨리며 길가까지 늘어진 밤나무 뒤로 산모롱이 끝자락의 오래된 다리가 슬쩍 드러난 풍경은 나를 그림책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

고개 마루를 다 내려와 작은 다리를 건너니 드문드문 한두 채 농가가 보인다. 길가 마을 하천은 수량이 적었지만 지나는 차나 사람도 없어 물소리가 청량하다. 가일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이 없었다. 교회 앞으로 겨우 경운기나 지날 법한 농로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200여m 가다보니 길은 막히고 ㄱ자 형태의 작고 허름한 집에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계셨다.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 이를 데 없다. 며느리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산비탈 텃밭에서 일을 하다 내려왔다.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는 아흔이 넘었다. 하나 남은 윗니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아기 같아 보였다.

 

 

 

 

 



“저기 화천 달거리라는 데서 열여섯에 시집와서 여기서 쭉 살았지. 내가 이제 옛날 일은 잘 몰라. 생각이 안 나네.”

큰소리를 질러대며 여쭸지만 길게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아버지 고향이 화천군 원천리인데 거기서 혼인을 하시고 나를 낳고는 전쟁 때 충청도로 피란갔다가 광주군에서도 좀 살다 65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우리 어머니가 9남매를 낳았어요. 둘은 잃고 7남매가 여기서 자랐어요.”

자연스럽게 작은 집을 훑어보게 되었다. 작은 방 세 칸, 두어 평의 마루, 댓돌에서 세 발짝 건너 외양간. 7남매 중 장남에게 이 산골 오두막으로 시집와 5남매를 두고도 시동생들이 많았다는데….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던 방에서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열 식구가 넘는 가족이 모여 살기에는 너무도 작아보였다.

“나도 나룻배 타고 용산리에서 스물 하나에 시집왔어요. 이렇게 산골인지도 몰랐죠. 처음 시집왔을 때만 해도 댕기를 길게 드린 처녀들이 많았어요. 안방, 건넌방, 사랑방 이렇게 있었는데 부부방이란 건 없지. 그때 여기서 애들 다섯이나 낳고 시동생이며 아이들이며 다 한 방에서 뒤섞여 자고 그랬어요. 시집왔을 때만 해도 등잔불 켜고 물 길어다 먹으며 농사짓고 살았죠. 불 때서 새벽밥 지어 먹고 냇가에서 빨래하고, 점심밥 해서 머리에 이고 화전으로 들고 날랐지. 먹을 물은 큰 솥 5개 걸어 거기에 담아두고 물 떨어지면 한겨울에도 샘물에 가서 떠다 먹었어요. 그렇게 고생스러웠어도 그때가 좋았어요. 어른 알아보고 일도 같이하고 점심은 이 집, 저녁은 저 집, 돌아가며 음식 나누어 먹고 집집마다 애들이 우는소리, 웃음소리가 넘쳐났는데….”

밝고 환한 얼굴의 67세 며느리 박남순 씨는 시내에서 청소 일을 하며 생활비에 보태고 일이 없는 날이면 남편과 이곳에 들어와 시어머니와 텃밭을 보살핀다.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라고는 교회 목사네밖에 없다. 농사짓는 50대는 없고 대부분 70~80대인데 그마저도 몇 가구 안 된다. 주민의 반은 별장이나 주말주택으로 이용하는 외지인들이어서 나이가 아주 많은 동네 주민들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유독 이 마을이 적막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봉영(75) 씨의 얘기를 좀 더 들었다.

“그때는 여기 산길에 차가 못 다녔죠. 전쟁 때 그나마 제무시라는 군인차가 다녀서 길이 좀 넓어졌지요. 그래도 일반 차량은 어림없고 이 동네는 지금도 버스가 안 다녀요. 20년만 해도 경운기도 없고 하니 소 두 마리로 밭을 다 갈았어요. 지금은 멧돼지 고라니 때문에 농사도 못지어요.”

75세 아들은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춘천댐이 들어서기 전, 지금은 물속에 잠긴 지촌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지촌초등학교는 두 번이나 옮긴 것이라고 했다. 학교가 옮겨지고는 마을 아래까지 산길로 10리를 걷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학교를 다녔다. 이 집 위에 있는 가일분교는 화전 정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80여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화전민들이 떠나고 춘천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고립되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 학교도 폐교되었다. 한참을 머문 마루에서 일어나며 기념사진을 찍어주니 남순 씨는 아직 덜 자란 애호박 두 개를 냉큼 따주었다.

본 마을이 물에 다 잠겨 산골로 이주한 터라 농토는 골 따라 조금 있을 뿐이고 강변으로 꽤 긴 마을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북한강변 마을길 건너편은 원평리다. 선착장 건너는 신포리인데 배를 타고 이곳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20년 전 만해도 보따리 장사들이 많았다. 생선, 과자, 화장품, 옷가지 등을 팔러 와서 콩이나 팥으로도 받아서 장에 다시 내다 팔아주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강변길 또한 고요한데 걸어다니며 낚싯줄을 던지는 이 둘을 만났다. 아버지를 따라온 아들은 두 아름쯤 되는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강물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마침 블루길이 잡혔다.

“대부분은 잡아서 도로 놓아주어요. 아주 가끔 배스를 잡으면 동네 주민을 주기도 해요. 이곳이 조용하고 물도 깨끗해서 20년 째 이 마을에 와요.”

경상도 출신인 유창희(48) 씨는 강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일터가 모교이다. 《춘천사람들》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니 더욱 반가웠다.

 

 

 

 

 



블루길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조금 더 올라가니 건축협회상을 받았다는 펜션 건물이 근사했다. 아주 심플한 노출 콘크리트 양식에 크고 작은 창이 예사롭지 않았다. 강변의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마당엔 나무를 심지 않고 푸른 잔디만 넓게 깔았다. 마당 한 귀퉁이 자작나무 몇 그루와 그 아래 세 마리의 기린 조각품이 건축물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 느껴졌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강변 논두렁에 핀 노란 루드베키아가 사랑스럽고 수초 앞 백로도 한가롭다. 좀 늦은 모를 심은 듯 아직도 초록빛이 싱싱하다. 선착장이 보일 쯤 붉은 고추를 따는 주민을 만났다. 서울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했고 낚시가 취미였던 서병갑(70) 씨는 30년 전부터 이 마을을 알았다. 땅을 조금 사 두었다가 20년 전에 아내와 귀농을 했다. 10여 년 전에는 마을의 이장일도 보았다. 3천여 평의 농사를 짓는데 올봄에는 마늘 5백접을 수확했다. 곧 무와 배추를 심을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에게 주로 직거래를 해요. 3천여 평이라야 돈이 크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정도예요.”

얘기하는 동안 산모기들이 옷을 뚫고 마구 공격해왔다.

“그러니 우리 농사꾼들이 얼마나 불쌍해. 벌에 쏘여, 모기에 물려, 날은 더워, 비는 안 와. 그래도 유통업자만 좋지 우리는 빚만 늘어요. 가엽게 여겨야 해요. 어서 가요, 여기서 물리면 쉬 가라앉지도 않아요.”

시커먼 산모기를 피해 강변 길로 다시 내려왔다. 강변을 걷는 동안 보트를 탄 주민이 지나갔고 한참 만에 다시 백로가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미루나무 잎들 부비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전혀 쓸쓸하지도 외롭지도 않은 즐거운 고립이 잦아질 듯하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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