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손목인 곡·고복수 노래의 <짝사랑>(1936)이다. 노랫말에는 우리 언어로만 가능한 아름다움이 있다. 노랫말을 쓴 김능인은 <타향>, <바다의 교향시>도 썼다. 일제에 신음하던 민족을 달래준 작사가로 평가된다.

창살에 기대어 우는 여인, 귀밑머리 쓰다듬으며 이별을 달래는 남자, 능수버들이 비바람에 창문을 태질한다.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이재호 곡 1940)이다. 가난을 피해 왔던가,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던가. 궂은비 내리는 밤, 아주까리 초롱불 아래서 이별주를 나누는 광경은 지난 세기 우리 반도에서만 가능한 이미지다. 노랫말을 쓴 추미림은 <소양강처녀>를 쓴 반야월의 또 다른 예명. 그러나 정작 <짝사랑>과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영호(朴英鎬, 1911~1953)다. 어째서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북에 살거나(在北), 북으로 갔거나(越北), 끌려갔거나(拉北),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갔거나(歸北), 행방불명 된 사람들의 작품을 금지했다. 많은 작품이 무더기로 하관(下棺)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정부에 의한 반국가적 사건 혹은 반민족행위로로 판단한다. 살아남은 곡들도 있다. <짝사랑>과 <번지 없는 주막> 외에 <고향초>, <꿈꾸는 백마강>, <목포는 항구다> 등이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둔갑되어 살생부에서 지워진 것. 사라질 뻔했던 근대문화유산이 이렇게 지켜졌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되었다. 많은 작품이 제 자리를 찾았다.

금강산 북쪽, 동해에 접한 지역이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通川)이다.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랫말을 쓴 박영호도 통천 출신이다. 원산 광명보통학교 졸업, 와세다 대학 교재로 대학과정을 터득하고 1930년대 대표적 극작가가 된다. 연극이론 정립에도 앞장섰다. 1932년부터 작사가로 인기를 얻었다. 태평레코드와 시에론 레코드의 문예부장을 지냈다. <오빠는 풍각쟁이>, <연락선은 떠난다> 등 120여 곡이 그의 펜에서 흘러나왔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필명은 ‘처녀림’, ‘불사조’ 등.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희곡과 군국가요 가사를 썼다. 해방 이듬해 부인과 함께 고향이 있는 북으로 갔다가 한국전쟁 종군작가로 참전해 휴전을 앞두고 죽었다.

누군가 ‘남과 북이 형제’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남과 북을 어찌 형제라고 하십니까? 오른 눈, 왼눈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기 직전, 유구국(流球國)은 일본에 병탄되어 오키나와가 되었다. 최근 여론조사에는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일본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비율이 높게 나온다. 우리 젊은이도 통일을 원치 않는 비중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이들은 ‘통일비용’을 이야기한다. 통일비용은 ‘분단비용’에 비하면 크지 않다. 더구나 분단비용은 지속되는 소모비용이다. 통일은 ‘크게 남는’ 장사다.

나라를 잃고, 오른 눈과 왼눈 이 전쟁을 한 ‘바보 같은’ 선조들이지만 그들은 남과 북을 나누어 생각지는 않았다. 분단된 강원도 단일화 작업에서 스포츠 교류는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기고 진다. 노래는 화합과 조화가 본질이다.

<짝사랑>이나 <번지 없는 주막>은 북이나 남이나 ‘우리 노래’다. 강원도가 중심이 된 <박영호 가요제>를 제안한다.

김진묵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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