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시립청소년도서관 윤희순 동상 앞에서 진행
민병희 교육감, “지역 애국지들의 삶과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 넓힐 것”

 

의병장의 며느리이자 의병가의 아내로서 세 아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시키고 자신 또한 첫 항일 여성 운동가로 활약한 윤희순 여사는 불과 83년 전 우리 고장에 살았던 인물이다

지난달 29일 청소년시립청소년도서관 윤희순 동상 앞에서 최문순 도지사와 민병희 교육감, 이재수 춘천시장 등 50여명의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윤희순 의사 제 83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다. 비가 오는 가운데 야외에서 헌촉, 헌화, 추모사가 이어졌다.

윤희순 의사가 한글로 쓴 의 의병가사 중 ‘안사람 의병의 노래’와 ‘경고한다 오랑케들에게’.

민병희 교육감은 추모사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H.카아의 말을 인용하며 “윤희순 의사를 비롯해 유인석 선생과 남궁억 선생 등 지역의 여러 애국지사들의 삶과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의사는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유학자 집안 윤익상의 큰 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나이에 춘천 의병장 유흥석의 장남이자 의암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과 결혼해 춘천 남면 발산리에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활동으로 열 달간 집을 비우자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하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의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게 “우리나라 좀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나 쫓는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군을 좀벌레 취급할 정도로 두려움 없이 나아갔다. 또한 의병가, 경고문 등 그녀가 만든 노래를 따라 부르던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1년에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아들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고 중국인들에게 식량을 구걸하면서도 군자금을 모금해 항일단체에 전달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1913년과 191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한 투쟁운동은 계속됐다.

1930년 일본 앞잡이들이 요녕성 부근의 집에 불을 질렀다. 가족은 흩어지고 떠돌이 생활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 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 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 눈 쇠경이요 들리는 귀 막혔구나, 말하는 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 신세 슬프도다 보이나니 까마기라, 우리조선 어디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우리인군 어디가고 왜놈대장 활기치나, 우리의병 어디가고 왜놈군대 득실하니, 이내몸이 어이할고 어디간들 반겨줄까, 어디간들 반겨줄까”

아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돌아오던 중 윤 의사의 품안에서 순국하고, 11일 뒤인 1935년 8월 1일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유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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