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댐 수몰지역 실향민 최귀녀 씨

더위가 한풀 꺾인 풍물시장의 장날, 맛깔스런 김치에 감자 넣은 보리밥을 비벼 몇 입 뜨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치길래 돌아보니 가게주인 최귀녀(77) 씨가 “저기 국도 있어”라며 호호 웃고는 행주로 옆 테이블을 훔친다.

그는 춘천 오항리 항골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전쟁도 다 겪고 여섯 동생 기르다가 아버지 권유로 옆 마을 총각과 이른 결혼을 했다. 마흔 즈음 그는 1973년 마을이 댐건설로 수몰이 되자 손에 쥔 자산 하나 없이 춘천으로 들어왔다.

“고향, 그래도 생각하면 그립지. 그때 동네랑 나무들 아직도 눈감으면 선해. 마을이 물속에 잠기고 지금은 없어졌어. 그리워하면 어쩌겠나. 가끔 눈감고 그리는 수밖에. 그곳에 살았다고 고생 안 했을까? 그땐 다 그랬어. 수몰지역에서 몰리듯이 나왔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시내에서 교육받고 잘 성장했으니 그걸로 그만이야.”

대부분의 문장을 웃음으로 맺음을 하는 그. 하지만 술에 취한 나날을 보내던 남편은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기에 음식장사를 하며 세 아이를 키우던 시절은 웃음보다 눈물이 많았다.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입학금, 등록금을 치르려면 일수를 써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빚 갚기를 7년. 재산이 없어도 식당을 한다는 이유로 일수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3년과 6년을 각각 서부시장과 명동거리에서 정처 없이 장사를 했고 지금은 없어진 약사동 풍물시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리밥이나 만둣국을 판지 21년 만에 지금 풍물시장 자리로 오게 됐다.

“방송에 나간 적이 있어서인지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가격이 싸다고 올리라는 사람도 많지만 얼마나 더 하겠다고 값을 올려. 어떤 사람은 한 그릇 수북이 떠서 셋이 나눠먹는 상인도 있어. 주위에서 먼저 일러주는데 그냥 뭐 그러라 해. 우리가게 오는 사람들 다 배부르게 먹으라 해.”

모든 것을 직접 만들지 않으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만두피도 사다 쓰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직접 반죽하고 하나하나 빚는다.

술을 그리 좋아하던 남편은 4년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8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났다. “장사가 잘 안되나 보구려. 이곳을 찾아온걸 보니….” 반가움의 표시인지 농담인지 모르게 병상에서 건네던 이러한 말들조차 이제는 해줄 사람이 없지 않으냐며 또 호호 웃는다.

 

유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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