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다녀왔다. 동홍천ic에서 인제 방면 44번 국도를 타고 원동2리로 접어들어 홍천고개를 넘어간다. 조교보건진료소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삼거리 왼쪽길이 물로리 가는 물로 고갯길(삽다리고개)이다. 물로리(勿老里)는 예로부터 늙지 않는 골짜기라 하여 무로골, 무로곡(無老谷)이라 했다. 고갯길 초입에 들어서니 파란하늘 위로 쭉쭉 뻗은 일본 잎갈나무 숲이 가을바람처럼 선선하다. 고갯마루로 오를수록 구절양장이다. 사철가를 들으며 굽이진 길을 돌아설 때마다 가을꽃 추임새로 흥겹다. 하얀 면사포 같은 사위질빵 꽃 넝쿨, 톡톡 터지는 꽃향유의 축포, 보랏빛 칡꽃이 향기로운 화촉을 밝힌다.

물로고개를 내려오자 소양호 끝자락이 초지와 함께 드러났다. 달맞이꽃 군락 사이를 지나 초지를 걸었다. 호숫가에는 강아지풀이 한 가득 물결과 함께 흔들거리고 풀벌레 소리 간지러운 가운데 귀뚜라미 소리가 반가웠다.

삽다리골로 가는 4km의 길고 좁은 숲길은 우거진 나무터널이 있어 어두워지는가 하면 소양호를 슬쩍슬쩍 보여주는 매력이 있다. 길 중간쯤, 서울에서 쏘가리를 잡으러 왔다는 낚시꾼을 만났다. 오늘은 허탕을 쳤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밝았다.

삽다리골에는 10여 가구가 흩어져 있다. 선착장 부근 호수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주저앉은 오두막이 있다. 방갈로 같은 움막 수준의 집에 걸맞게 텃밭도 앙증맞게 작았다. 이순이(87) 할머니는 이곳에서 10여년을 살았다. 2년 전 수해 때문에 쓸려내려 갔다는 장독대 아래로 세 척의 작은 배가 한가롭다. 호수 건너편 골짜기에 사는 아저씨가 배를 타러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 작은 골짜기에도 한 가구가 산다.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마을에 들어와 살며 건강을 찾았다. 인적 없는 동네에서 만난 객이 반가워 다소 들떠보였다. 냉커피를 내주신 할머니는 수줍고 차분한 말씨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물로리에서 건강을 찾은 이순이 할머니.

“가끔 낚시하러 오는 이가 있으면 커피도 타주며 일부러 말도 걸어요. 11월부터 3월까지는 사람구경을 아예 못하지만 좀 적적해도 서울에 가서 살 생각은 없어요. 여기서는 밭일도 하니 심심하지 않고 마음이 편해요. 날 좋을 땐 희망택시가 있어서 가끔 중앙시장엘 가기도 하고 조교리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여기까지 데리러 와요.”

할머니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지던 순간의 섬광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피해자가 많지는 않았는데 밖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나는 일본에서 살던 소녀시절이 가장 행복했어요. 지금도 학교 주소를 외우고 있는데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고 싶어요. 반장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께 인정받았어요. 1946년 열다섯에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나를 공부시키고 돌봐주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누가 딸을 두고 오겠어요. 난 그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부산에서의 삶은 지독히 가난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눈시울을 붉힐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에 말동무하러 오겠노라 약속을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할머니는 며칠이고 묵어가도 좋으니 꼭 놀러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삽다리골 가장 안쪽에 사는 민원기(58) 박홍점(56) 부부는 서울에서 각각 검도관을 운영하다가 귀농했다. 엄밀히 말하면 귀촌이다.

물로리로 귀촌한 박홍점·민원기 부부.

“물로리는 소양댐으로 수몰된 지역이라 농토가 별로 없어요. 저희는 산에 다니며 약초나 버섯 등을 채취하는데 다른 수입원이 있어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귀촌한지 2년 만에 이장 일을 보고 있지만 워낙 산골오지다보니 애로점이 많아요. 삽다리골에서 갈골까지 한번 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산길로 16km, 두어 시간이나 걸리고요, 북산면사무소 한번 다녀오려면 춘천시내를 거쳐 배후령을 넘어 빙 돌아가야 하니 하루 종일 걸려요. 서울 가는 길이 훨씬 빠르죠.”

말은 그리해도 기꺼이 마을을 위해 시간을 내는 부부는 밝고 친절했다.

왔던 길을 돌아 나와도 지루하지 않은 삽다리길에서 가리산의 뾰족한 두 개의 봉우리를 보며 한천마을로 향했다. 한천마을에 이르기 전, 물로교에서 갈골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물로교를 건너가는 갈골은 품걸리까지 통한다. 봄내5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체로 품걸리 선착장에서 소양호 물길을 따라 걷다가 산 고개를 넘어 갈골 초입과 삽다리골 호숫가를 걸어 물로리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약 13km의 소양호 나루터 길을 즐긴다.

물로교 길가의 백일홍 사이사이로 얼굴을 내민 파란 달개비가 싱그럽다. 물로교를 그냥 지나쳐 300미터쯤 가니 정갈한 폐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리산 블루베리농원의 대표 박종휘 씨는 《춘천사람들》 조합원이기도 했다. 테이블에는 우리 신문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건축 일만 평생해온 그는 아내와 함께 귀농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블루베리 1천8백 주를 심어 연간 3천만 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자신감은 생겼다. 운동장을 빙 두른 잣나무는 70여 년의 세월동안 품을 키워 한 아름도 더 되어보였다. 박씨의 아내는 교정에 야생화를 심고 있었다.

귀농한 박종휘 씨 부부가 리모델링하고 있는 물로분교.

“체험과 숙박을 할 수 있도록 학교를 리모델링하는 중이에요. 6천만원정도 투자했는데 아직 손 볼 데가 많아요. 마을사람들에게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함께 하려고 해요.”

한천마을은 한천자묘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가리산자락 은주사 위쪽에 한천자묘(한총)이 있다. 학교를 지나자 규모가 작은 논밭들과 농가들은 옛집들이 많아 정겨웠다. 길옆으로는 계단 같은 바위로 떨어지더니 물은 너럭바위 위를 미끄러지고 숲은 깊고 인적이 드물어 어둠이 빨리 찾아왔다. 오른편 은주사 가는 절골길은 험한 비포장 산길이라 좀 서늘했다.

이 마을은 토속신앙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리마다 서낭당이 있고 당집, 서낭목, 남근석 아래에는 제단이 있고 마을에서 제를 지냈다. 은주사 바로 위 산신각은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산신각 주변에도 돌탑들이 있고 제를 지냈다.

한천자 묘역 가는 길의 마을 산신각.

은주사의 단청으로 보아 오래된 절 같지는 않아보였는데 주지스님은 천년세월이라 설명했다. 법당 앞에 있는 3층 석탑은 원형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쓰러져 깨진 돌들을 주섬주섬 어눌하게 쌓아 놓은 모양이 오히려 정이 갔다. 사찰 뒤에는 한천자 전설을 가진 묘가 있고, 왼편 작은 다리를 건너면 가리산 정상까지 한 시간 삼십 분정도 걸린다.

날은 저물고 샛별이 떴다. 커다란 밤나무 아래 평상에서 부채질을 하던 노부부에게 한천자묘와 가리산 기우제에 대한 전설을 아주 어린 시절처럼 들었다. 한천자 묘의 벌초를 가장 먼저 한 사람에게 큰 산삼을 점지해준다는 전설이 있어 심마니들 덕에 묘역은 늘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한다. 묘 부근에는 바위굴이 있어 심마니들이 머무는 곳이라 했다. 80대 노부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동갑내기 고향친구다.

“일제시대에는 바로 저 개울 건너 논에 공립학교가 있었지. 거길 다니다가 학교가 작아서 옮겼어. 요 평상 옆 밭이 운동장이었어.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집이 옮긴 학교 사택이었지. 그리고는 다시 옮긴 게 지금 저 아래 폐교야. 저 집을 내가 사기전에 다른 이가 구멍가게를 했었지.”

마타리 도라지꽃이 피는 딱 요 맘 때다. 소년을 기다리던 잔망스런 윤 초시네 증손녀가 오버랩 되었다. 개울 건너 학교를 다녔을 소년은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다친 곳 하나 없이 돌아왔고 소녀는 마을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그새 달이 뜨고 노부부는 흐뭇하게 미소만 짓고 있었다.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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