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고통이 번져날 때, 내 속속들이 깊은 곳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신 앞에,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의 모양과 아픔의 형체를 껴안고 제단 앞으로 나아가 신음소리만으로 그 절절함을 내려놓고 깊은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는가?

막스 부르흐(Max Bruch 1838~1920)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말로 할 수 없어 신음소리로 밖에 표현이 되지 않던 그 기도 같은 곡이다. 히브리의 옛 성가인 이 곡은 “하느님의 날”이란 뜻으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 협주곡 형식이다. 유대교의 가장 귀중한 속죄의 날 저녁에 교회에 모여 부르던 곡의 선율에 감명을 받은 부르흐가 1부 Adagio ma non troppo 4/4박자 느린 단조로, 2부 Un poco Piu animato 장조로 작곡한 10여분 정도 연주되는 짧은 곡이다. 마음 속 깊은 폐부에서부터 끌어올려 신께 올리는 말 없는 영혼의 언어. 첼로의 선율이 꼭 그 느낌이다.

단조로 시작되어 흐르는 선율이 마치 오래 묵은 아픔과 고통이 울음으로 터져 나오는 듯해서 무겁고 슬픈 느낌이지만 음악을 듣고 난 후에는 카타르시스가 온몸에 전율처럼 번진다. 연주자마다 곡의 표현과 해석이 또 다르니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버전으로 들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지금 소개하는 연주의 느낌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니 듣는 이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또 다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쟈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듣는 순간 심장이 툭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가슴 아픈 삶의 궤적이 그대로 반영된 듯 느릿하고 뭉근한 슬픔이 바닥에 깔려 심장으로 스미듯 흘러든다. 목구멍이 아프게 울음을 토할 것 같은 선율이다. 무조건 들어보기를 권한다. 피아노 보다는 오케스트라 반주가 훨씬 좋다.

피터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 그의 첼로는 고요하다. 감은 눈 안에 침묵으로 깊어진 영혼의 깊고 조용한 기원이 들린다. 처음에는 너무 예쁘기만 한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가 틀렸다. 울울한 슬픔이 고요하지만 나약하지 않다. 절실하다. 아프다.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그의 첼로는 묵직하다. 통곡이 섞인 고통스러움이 울음을 참아내느라 꺽꺽거린다. 투박한 듯 하면서도 슬픔의 빛깔은 명료하다.

그 외에 미샤 마이스키, 파블로 카잘스 같은 첼로 거장들의 음악도 그 색깔이 모두 다르다.

이처럼 하나의 선율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마음에 물들여져서 그 영혼의 빛깔로 새롭게 채색되어 나오는 것이 예술의 묘미가 아닐까? 그림도, 사진도, 음악도, 무용의 안무도, 표정도···. 모든 것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것이다. 이 가을의 문턱에서 차마 꺼내보기 어려운 슬픔이 있거든 부르흐의 ‘콜니드라이’를 곁에 두고 깊숙한 생각을 꺼내어 대담하게 만나보길 권한다. 슬픔은 슬픈 감정으로 치유가 된다고 하니 음악을 껴안고 음악처럼 한바탕 흘러보시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백경미 (라온오케스트라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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