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라온오케스트라 단원)
백경미 (라온오케스트라 단원)

별이 온통 내게로 쏟아져 내렸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골목길을 접어든 순간 무방비로 쏟아지던 피아노의 선율이 꼭 그 느낌이었다. 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나는 협주곡을 좋아한다. 오케스트라가 주는 잘 섞인 음의 반죽에, 순간 튀어나오는 독주악기의 음 빛깔이 선명하게 나타날 때의 그 반짝거림이 좋다. 특히 카덴차(cadenza, 악장이 끝날 무렵 등장하는 독주악기의 기교적인 부분) 부분. 모든 악기소리를 젖히고 독주자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연주하는 독주악기만의 세계가 세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터치하는 느낌을 무척 좋아한다. 그것이 또한 협주곡의 묘미이기도 하다.

‘황제’의 1악장에서는 카덴차가 곡의 말미에 연주된다는 통상의 규칙을 깨고 시작과 함께 여과 없이 반짝거리며 갑자기 와르르 쏟아진다. 시원하다. 그래서 1악장을 선호했고 편식처럼 1악장만 듣고 또 들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버나드 로즈 감독, 게리 올드먼이 주연했던 영화 ‘베토벤 불멸의 연인’을 본 후 나는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을 새롭게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베토벤의 음악이 화면에 가득 흐르던 영화였다. 생각해보면 여태 내 머릿속에 그려진 베토벤은 열정적이고 화려하고 힘이 센 작곡가였다. 그런데 달랐다. 가슴이 아리도록 슬픈 감정이 스멀거리며 기어 나왔고, 감미로웠고,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며 나를 송두리째 없애버렸던 음악이 바로 이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이었다.

이 곡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혹시 그 느낌을 알고 싶거든 조용히 흐르는 강의 곁에 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스치는 바람을 물결에 싣고, 흐르는 시간을 끌어당겨 뭐가 그리 급하냐고 비웃듯 느리게 천천히 흐르는 강. 살면서 마주쳐야했던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순간. 그 순간을 지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견뎌야 했던 가슴 저미는 아픔. 모든 것들을 가져가 담그면 그대로 물에 풀어놓아 슬픔의 형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어주던 쓸쓸하지만 따뜻이 위로 받게 되던 안위의 빛깔. 그 느낌이 피아노 선율로 오케스트라의 흐름을 타고 강 건너 풍경처럼 내게로 건너온다.

영화 ‘불멸의 연인’ 마지막 기막힌 반전의 장면에서 베토벤의 죽음 이후의 진실을 알고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을 감독은 2악장의 선율만으로 표현한다. 기가 막히다. 그렇지만 이 음악의 백미는 그 다음이다. 베토벤은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곳에 공간을 두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 아주 가늘고 여린 PP(피아니시모)의 선율이 끊어질 듯 흐르다가 다음 악장으로 이어지며 ff(포르티 시모, 매우 세게)로 찬란하게 터져 나온다. 전율이 온 몸을 휘감는 순간이다. 내게는 단연코 최고의 음악이다.

지금은 가을. 산의 빛깔이 아름답게 물드는 시간이다. 낙엽송이 부드러운 금빛으로 나직하게 물든다. 단풍든 산을 비추는 강의 빛이 깊어진다. 새봄의 느낌이 간질거리고 가벼운 환희의 빛이라면 가을은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고, 깊어지는 시간이다. ‘베토벤 불멸의 연인’과 함께 그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전 곡을 기왕이면 잔잔히 흐르는 강의 곁에서 한 번 커피 향처럼 음미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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