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암지(강촌낚시터)
박암지(강촌낚시터)

구름을 잔뜩 안은 하늘이 무거웠다. 충의대교에서 가정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가정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 박암관천길 초입의 들녘은 어느새 노랗게 물들었다. 가을이로구나.

박암관천길은 야트막한 산길이 홍천강  옆으로 누워 관천리 방하리로 이어진다. 마을도로에는 지나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 2km쯤 호젓한 길을 가다보니 오른편 임도(林道)가 손짓한다. 가정임도는 2009년 산불예방과 산림경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임도는 가파르고 험했다. 600m쯤 오르니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개인소유의 산지였다. 출입을 금하는 표지가 있었지만 문이 열려 있어 산길을 올랐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기 머금은 분홍 물봉선, 하얀 고마리 덤불이 촉촉하고 산초나무 열매들이 붉은 가지 끝에서 싱싱하다. 붉나무 어린 나무들은 벌써 물들기 시작하고 누리장나무의 붉은 껍질과 검푸른 열매가 빛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정상부에 이르니 벌목한 주변으로 인해 기암절벽 위의 소나무가 돋보였다. 산 아래로는 가정리와 홍천강, 충의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산봉우리엔 운무가 내려오고 있었다. 갈림길까지 되돌아나와 왼쪽 가정임도를 구불구불 돌아 나왔다. 골짜기를 따라 2.2km쯤 되는 이 길은 경사가 심해 농가가 거의 없었지만 미래를 위해 어린나무와 약초를 심는 사람들이 멀리 보였다.

임도에서 바라본 충의대교와 가정리.
임도에서 바라본 충의대교와 가정리.

임도를 내려오면 5번 버스가 다니는 박암관천길이다. 홍천강이 슬쩍슬쩍 보이기도 하지만 한여름만 아니라면 호젓한 산길이다. 이 길에는 수상레저시설과 캠핑장, 숙박업소가 심심찮게 자리 잡고 있다. 홍천강변 마을이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지만 강변에는 외지인이 땅을 사들여 상업시설을 운영하고 토박이 사람들은 산 아래 마을 안쪽에 모여 살고 있다. 청평댐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발을 담그고 놀던 강변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 길에 있는 어느 캠핑장을 방문했다. 홍천강변에 대규모 카라반 단지로 조성된 캠핑장에서는 수상레저도 운영하고 있었다. 흐린 날씨라 한낮에도 서늘해서 광장에 있는 수영장은 텅 비어있었고 이따금 낚싯대를 들고 포인트를 찾아 자리를 옮기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강변에는 수상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은 날씨와는 무관해보였다.

수상스키를 타는 여행객.
수상스키를 타는 여행객.

캠핑장에서 관천리 방향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박암리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주변으로 약간의 농지가 있고 윗박암, 아랫박암에 모두 30여 농가가 있고 대부분 노인들이 소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마을 초입에는 ‘그림숲’이란 연수원이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높지 않은 울타리 사이로 잔디와 조경수로 관리가 잘된 넓은 운동장이 보였다. 문에 다가서자마자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드는 험상궂은 사냥개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르기가 힘들었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강남의 어느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체험관이라고 했다. 그림숲 뒤쪽에 있는 축사와도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을회관 못 미처 소나무 세 그루가 멋진 농가에서 노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체구가 작은 할아버지는 이곳이 고향이다. 할머니는 우물가에서 개복숭아를 손질하며 먹어보라 권했다.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해 개복숭아로 버텼다는 내평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자두만한 개복숭아는 아주 잘 익어서 새콤달콤했다. 마흔이 넘은 막내아들이 장가를 안 가서 걱정이 많은 할아버지는 가정초등학교를 다녔다. 평생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아이들 길러내고 논 몇 마지기 조금 있다고 했다. 막내아들은 강변에 있는 땅을 물려받아 캠핑장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림숲 대표가 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심어주었다는 세 그루의 소나무 사이에 허름한 평상이 있었다.

고향을 지키는 노부부.
고향을 지키는 노부부.

“이제는 농사일도 못해요. 그저 더 안 아프고 살다 가면 고만이지.”

기념사진을 찍자하니 노부부는 거기 앉아 쑥스럽게 웃어보였다. 거리를 두고 앉은 노부부의 거리도 이만큼이면 좋겠다 싶었다.

마을 초입에는 ‘투쟁’이란 붉은 글씨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을 소로에도 빈집에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을회관을 지나자 심플한 디자인의 엷은 황토빛 벽돌 건축물이 여러 동 있었다. 절이라기엔 아주 생소했다. ‘제따와나선원’이었다. 사찰명도 생소하고 늘 봐왔던 절집의 풍경도 아니었다. 선원의 사무국장을 만나 선원의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제따와나’는 제따왕자가 보유한 숲에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지어 석가모니 부처님께 보시한 선원으로, 한국에는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인도의 사왓띠 외각에 위치한 이곳은, 부처가 가장 많은 안거를 보내고 수많은 가르침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다.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을 되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춘천 제따와나선원 도량 전체를 인도 제따와나 유적지와 같은 벽돌 건물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 벽돌들은 파키스탄에서 구운 것을 가져왔다고 해요. 이곳은 수행도량입니다. 진입로 문제로 마을사람들의 오해와 마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원만히 해결되었어요.”

제따와나선원의 도량.
제따와나선원의 도량.

선원은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매우 고요했다. 명상을 마치고 나온 수행자들은 유리창을 닦는 등의 울력을 하는 동안에도 말을 아꼈고 몸동작도 고요했다. 일묵스님 책을 받아들고 일이 좀 한가해지는 겨울에는 이곳을 다시 찾아 명상을 하는 상상을 하며 선원을 나왔다.

해가 짧아졌다. 하루종일 빗방울이 오락가락했다. 윗박암에서 내려오니 다시 버스가 다니는 박암관철길이다. 그림섬 앞 강변 쪽에 박암지가 있다. 이곳은 홍천강변이 시야에 시원스럽게 들어오는 데다가 주변 수상레저 풍경이 주는 역동감도 즐기며 낚시를 할 수 있다. 붕어나 메기도 잡을 수 있다는 강촌낚시터는 강태공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갈대와 연, 수초가 수면의 절반을 덮었고 산 그림자는 떨어지는 물방울에 흔들렸다. 흔들리는 수면만을 응시한 이들도 수행 중일까? 이곳에 둥지를 튼 백로들의 하얀 날개 짓이 드리운 낚시대보다 여유롭다. 피어나는 붉은 갈대와 백로에 마음을 뺏겨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을길 옆 작은 개울이 흐르는 막다른 길, 산기슭의 오두막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여러 차례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김종성(75세) 할아버지는 병든 아내를 돌보며 살고 있다.

“가정국민학교를 9살에 입학해 3학년에 중퇴하고 줄곧 집안 농사일을 도왔지. 8남매 중 장남이라 어린 나이에도 고된 일은 도맡아 했어. 농사를 지면서 틈틈이 목수일을 배워 가끔 가평에 일거리 생기면 왔다 갔다 했더랬지. 그때 내 25살이었던가, 가평 처자인 지금 부인을 만났어. 27살에 결혼 치르고 그때부터 가평에 살면서 목수일을 본격적으로 했어. 그땐 일이 많아서 돈도 많이 벌었지. 30년 전 이곳 박암리에 다시 오게 된 건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장남의 책임감 때문이랄까. 그동안 목수일 하면서 벌었던 돈도 셋째 동생 양계사업자금 대주고, 나머지 동생들에게 조금씩 보태주고 하면서 다 소진해 버렸지. 어머니는 5년 전 돌아가시고, 부인은 3년 전에 거동도 못하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지금까지 내가 혼자 보살피고 있어. 나도 1년 전에 경운기 사고로 몸이 불편해 농사도 못 짓고 노령연금과 가평에 있는 딸이 조금 보태주는 용돈으로 연명하고 있어”

노인 돌봄서비스를 받아보면 어떻겠냐 하니, 필요없다고 하신다.

“내 사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내 마누라는 내가 챙길 거야. 이 사람이 먼저 죽을지 내가 먼저 죽을지 알 수 없지만, 마누라 죽을 때까지 내가 챙길 거야. 이 사람 내가 묻고 그 다음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죽으면 이 사람 불쌍해서 어떡해”

할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더 이상 말을 잇기 어려웠다. 마지막을 지켜봐주는 이가 동반자라면 행복하겠지만 먼저 감이 더욱 미안할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편하게 해주고 싶을 것이다.

이미 어두워진 박암관천길. 희미한 농가의 불빛들이 밤을 지나고 있었다. 내일도 내 곁에 남아 있을 누군가를 위해….

김예진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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