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람리 재너머골 잣나무 숲
인람리 재너머골 잣나무 숲

어질 인(仁), 산바람 또는 산에 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람(嵐). 인람리(仁嵐里) 한자의 의미가 맘에 들었다. 조선시대 성종 때 시인 망헌 이주의 인람정(仁嵐亭)이 있었으므로 ‘인람(仁嵐)’이라 했다고 한다. 춘천호의 물안개가 걷히고 가을 단풍이 호수에 드리우면 절로 시 한 수쯤 나오지 않을까!

용산리를 지나는 407번 국도변 호수에 햇살이 드리우면 백사장 은빛 모래밭 같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고탄리 낚시터를 지나 솔다원 나눔터와 정자가 있는 삼거리에서 정자를 끼고 송암리로 들어섰다.

담배건조장.
담배건조장.

노랗게 익어가는 들녘 위 뽀얀 뭉게구름 사이로 하늘이 하루 전보다 더 파랗다. 논두렁에 핀 보랏빛 배초향 무리, 새파란 닭의장풀, 연지 찍은 고마리 덤불이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키를 한껏 키운 말간 왕고들빼기 꽃 위로 가을 나비 한 마리, 날개 짓이 숨 가쁘다. 70년대 흙벽돌로 지은 담배건조장 건너편에는 죽어서도 둥지를 품은 거목이 있었다. 고목이 살아 꿈틀대는 기상이라니, ‘아베’를 품은 어미처럼 다가왔다.

작은 언덕길을 지나 인람리에 들어서니 좁은 계단식 논밭들이 마을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무리 지은 참새 떼가 조밭으로 풀섶으로 푸드득거리며 부산하다. 송암리에서 봤던 담배 건조장이 이곳에도 있었다. 담뱃잎은 길게 엮어 널어두고 건조장에 불을 지펴 말렸다.

마을 초입의 길가에 마주보고 있던 대추나무 두 그루에는 어찌나 대추알이 굵던지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폐가전제품과 고철들이 어수선하게 쌓여있던 마당에 할머니 한 분이 고추를 걷어내고 있었다. 고추 크기도 잘고 그 양으로 보아 할머니 혼자 소일을 하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기 10년 전까지만 해도 느타리버섯도 재배하고 담배도 하고 농사가 많았어요. 내가 스물하나에 시집 왔는데 여기 댐이 생기고 물이 들어차면서 면사무소도 학교도 없어지고 지금은 이 동네에 아예 학교 다니는 애들이 없어요.”

고소득이 되는 비타민 나무를 심은 산.
고소득이 되는 비타민 나무를 심은 산.

할머니의 아들은 시내에서 고물상에 취직을 했다. 시세가 낮게 형성되면서 고철은 마당에 쌓이게 되었다. 할머니집 앞산은 민둥산처럼 보였는데 소득이 좋다며 산주가 비타민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했다. 멀리서 보니 초지같은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할머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2년 전 귀농했다는 50대 초반의 부부가 전세를 얻어 살고 있다. 농촌에서 50대면 청년이다. 남편은 직업군인으로 곧 퇴역할 예정이고 도시에서 사업을 했다는 부인은 이제 편히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고자 근처에 농가주택을 짓고 있다.

“주변에서 어르신들이 다 알려주시고 우리 먹을 거나 짓는 농사라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어요. 부동산을 통해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곳이 가장 맘 편안했어요.”

부부는 2년간의 적응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가마솥에는 무엇가가 끓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알록달록한 색의 다알리아 백일홍은 유행가를 닮았다.

언덕 모퉁이를 돌아 내려와 연못과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은 농가에서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가마솥을 실은 트럭이 홍보용 멘트로 목청 높이며 노랫가락을 타듯 언덕을 내려왔다. 부산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84세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정하고 건강했다. 춘천 시내에서 40년 정도 건축 일을 했다. 사업이 그리 잘 되지는 않았다. 20년 전 평당 12만원에 400평의 땅을 사고 9개월 동안 혼자 집을 지었다. 연못도 물레방아도 직접 조성했다.

“내가 건축 일을 오래해서 웬만한 공구는 다 있어요. 보일러며 전기, 내가 못 하는 게 없어.”

아담한 크기의 황토 집 외벽엔 타일을 띄엄띄엄 붙여서 장식을 했고,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덩굴식물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당의 자투리땅에도 빈틈없이 꽃과 채소를 심고 호두나무에는 손자들을 위한 그네도 매달았다. 손님을 위해 전기장치를 연결해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도 보여주고는 옷을 갈아입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자상한 멋쟁이 할아버지였다.

“도시에 사는 노인들이 나는 불쌍해. 할 일이 없으니 우두커니 들어앉아 있거나 노인정에 모여서는 화투나 하고 술이나 먹으니 몸 아프고 병원에나 다녀요. 그래서 시골 오면 병원 멀어서 안 된다고 하는데, 요새 복지가 좋아져서 이런 벽촌까지도 119를 부르면 아무리 늦어도 20분이면 옵니다. 공기 좋지, 작물 자라는 걸 봐요, 얼마나 좋아. 요즘은 동네에 독거노인이 있으면 말벗이 하루 한 번씩 살피러 와요. 그러니 혼자 죽어도 걱정이 없지. 도시 노인들 생각을 바꿔야 해요. 내가 슬슬 고추 농사를 지어 일 년에 1천만 원을 넘게 버는데…, 서울에서는 손자들이 발꿈치를 들고 다니는데 여기만 오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큰소리로 웃고 노니 애들도 스트레스가 없어요. 퇴직하자마자 시골을 오면 얼마든지 돈 벌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데 말이지요.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해. 내 이 말을 꼭 써줘요.”

할아버지의 제 2의 인생은 그렇게 60대에 이곳에서 시작해 만족한다. 그래서 도시 은퇴자들에게 농촌으로 올 것을 권했다. 할아버지 집을 나서는 길에 따 준 굵은 대추알은 벌써 맛이 들어 있었다.

직접 만든 물레방아에서 포즈를 취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직접 만든 물레방아에서 포즈를 취하는 멋쟁이 할아버지.

마을회관에서 앞이 갈림길이다. 왼쪽 길로 회관을 지나 37번 종점에서는 오월교가 보일 정도로 춘천호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종점 길가에 있는 집 뒷길로는 아주 궁상맞은 소로가 겨울에는 특히 위험할 듯했다. 차로 5분 정도를 가니 길은 끝이 나고 아름다운 별장이 나타났다. 별장 가는 중간에는 탐스러운 사과가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름장마에 상류에서 나뭇가지, 쓰레기, 스티로폼들이 떠내려 와 호수 가장자리에 모여 있는 부유물은 학교 운동장 넓이만큼 차지하고 있었다.

사북면 일대는 사선(死線)이 지나는 곳이니만큼 1950년 6·25전쟁의 상처가 깊고 아픔이 큰 동네다. 인람리 사람들도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와 삶의 터전을 일구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65년 춘천댐의 건설로 옥토와 집을 물속에 두고 고향을 떠나야만했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 실향민의 아픔은 오랜 세월 동안 호수바닥으로 가라앉아 잊혀가고 있다.

1979년 출간한 전상국 씨의 소설 《아베의 가족》은 인람리가 배경이다. 지금은 물속에 잠긴 샘골은 아베와 김진호의 어머니가 새살림을 시작했던 곳이다. 어머니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해 뱃속에 있던 아이가 상처를 입어 백치로 태어났고, 가족들은 아베를 버렸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세계 일등 국가의 시민이 되었어도 여전히 ‘나’와 가족들은 아베를 떠날 수 없었다. 의붓형 김진호가 아베를 찾아 샘골을 방문한다. 그는 ‘아베’를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로 인식하고, 가난과 범죄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가 있는 곳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인람리에서 바라본 춘천호.
인람리에서 바라본 춘천호.

작가는 《아베의 가족》을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드러내고 용서와 화해, 치유를 위한 과정을 이곳 인람리 샘골에서 시작했다. 가라앉은 샘골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의 빛인 양 호수표면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 이내 재너머골 잣나무 숲길이다. 여름태양의 폭력도 피할 수 있을 만큼 품이 넓다. 춘천호의 파란 물결이 이따금 숲으로 들어온다. 깊게 들이마시지 않아도 피톤치드향이 온 몸에 스민다. 솔잎이 두텁게 깔린 푹신한 숲 바닥에 이따금 캠퍼들이 힐링하러 온다. 숨겨두고 싶은 숲이다. 게다가 시내에서 30분 거리지 않은가. 연두빛 움틀 때, 새파란 소슬바람 그리울 때, 하얀 숫눈길을 걷고 싶을 때, 망설이지 말자.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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