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흥우 (편집국장)
전흥우 (편집국장)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대 전란을 겪은 후 조선사회의 신분제는 서서히 해체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은 더욱 심해져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들의 처지는 갈수록 곤궁해졌다. 특히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이 극심했다.

이 중 군정은 군역의 의무가 있는 16~60세의 장정에게 부과되는 것인데, 대부분 실역보다는 국방세에 해당하는 군포를 냈다. 이 군포는 정확한 호구조사를 기초로 개개인에 부과되지 않고 마을 단위로 수량이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돈으로 양반을 사거나 향리와 결탁해 군역을 면제 받거나 유랑을 하는 등 군포를 낼 사람은 줄어드는데 내야 할 수량은 변동이 없어 결국 힘없는 백성들이 그 몫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는 데 있다. 장정이 아닌 어린아이에게도 부과되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돼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니 ‘백골징포(白骨徵布)’니 ‘족징(族徵)’이니 ‘인징(隣徵)’하는 말들이 횡행했다. ‘족징’은 친인척에게, ‘인징’은 이웃에게 대납시키는 것.

‘황구(黃口)’란 ‘부리가 노란 어린 새’를 뜻하는 말로, 5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지난 28일 국세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4세 유치원생이 아파트 두 채를 4억원에 사고, 또 다른 12세 초등학생도 11억원에 아파트 두 채를 매입했다. 34억원 규모의 건물을 산 뒤 임대소득을 줄여 신고한 초등학생도 있었다. 한 치과의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10억원짜리 상가건물을 고등학생 자녀의 명의로 바꾸면서 현금으로 2억5천만원의 증여세까지 대납했다. 이후 자녀는 임대사업자로 등록해 매달 임대료로 수백만원을 받았다. 전형적인 불법증여 사례다.

국세청은 이처럼 만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게 부동산, 고액 예금, 주식 등을 증여하고 세금을 내지 않거나 대납해 준 혐의가 있는 204명을 선정해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세부적으로 자금 출처가 불분명한 주택을 취득한 미성년자가 41명, 편법증여가 의심되는 고액예금을 소유한 미성년자가 90명, 경영권 편법승계로 이어질 수 있는 주식 변칙증여의 경우가 73명이다.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미성년자 증여 건수는 7천861건으로 1조279억원에 이른다. 2015년 5천545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또, 지난해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김병욱 국회의원이 한국예탁결제원과 KEB하나은행, KB국민은행에서 제출받은 18세 이하 미성년자 보유 상장회사 주식과 배당금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성년자 주주들이 2천45개 상장회사 주식 1억5천480만주를 보유했다. 시가총액이 무려 2조억원에 이른다. 미성년자 주식부자왕은 만 14세 청소년으로 시가총액 745억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10억4천만원을 보유한 0세 주주도 있었다.

‘금 수저, 흙 수저’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경제정의’, ‘조세정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조선후기의 황구(黃口)들은 군포를 내야 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황구(黃口)들은 금 두꺼비를 물고 다니는 형국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황구첨정’의 한자를 ‘黃口簽丁’이 아니라 ‘黃口添錠’으로 고쳐 써야 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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