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세대가 이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최근 장인어른을 떠나보내며 생로병사라는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를 새삼 마주했다. 더불어서 지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사회라는 유기체의 존재양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에 따라서는 한 사람 한 세대의 죽음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시크하게 잊어버리기도 한다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어색한 일이다. 동양, 특히 유교 전통은 생명을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계승의 사회적 관점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런 전통의 세례를 받았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상례와 제례를 통해 부모와 조상을 모시고 기리는 일은 불멸을 향한 사회적 욕망이다. 여기서 내세나 귀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덧없는 소멸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존재가 이어지는 양식이 중요할 따름이다.

제천에서 농사짓는 귀농자가 조문객으로 와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었다. 마을 어르신을 선산으로 모실 경우 상여를 드는 전통은 농촌마을에 더러 남아 있지만, 그 마을은 십여 년 만에 달구질 소리가 부활했다고 한다. 시신을 땅 속에 누이고 땅을 다지며 부르는 소리가 회다지 소리 또는 달구질, 들구질, 다구질 소리다. 그 귀농자는 도시에서만 살았고 귀농한 지 5년 남짓 되었을 뿐이니 달구질 소리를 알 턱이 없었는데, 단지 목청이 좋다는 이유로 어르신들이 소리를 해 보라고 권했단다. 밤새 네이버, 유투브를 찾아보고 그 어려운 것을 결국 해냈다고 한다. 어차피 민중의 소리는 틀에 박힌 것이 아니니 한껏 자유롭게 멋대로 선창을 해도 그 누구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나.

농촌이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초등학생도 아는 이야기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10년 사이에 농가인구 3백만 그리고 65세 이상 33%에서 200만, 43%로 속절없이 숫자는 변하고 있다. 지방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도 익숙해졌다. 이에 따르는 여파는 한 둘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구조와 미래에 관한 중차대한 문제들이지만, 당장의 실질적인 부담은 농촌만 오롯이 감당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네팔 노동자가 거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삼겹살 먹을 때 상추를 먹을 수가 없다. 그 일손조차 구하기가 어렵고 지금은 어찌어찌 버티지만 계속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런 구조가 고착화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인가? 농촌에 학교가 사라진 지는 오래다. 경제논리에 따라 사라질 것은 사라지는 것이 합리적 정책인가? 농촌에 사람이 없으니 민중들에게 최후의 비빌 언덕이었던 자생적 복지체계와 기초적 사회안전망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누구와 협동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꿋꿋이 가게를 열고 있겠느냐는 말이다. 국가 예산으로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지만, 그나마도 아깝게 퍼준다고 도시민들은 난리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람이 줄어들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는 이 단절의 현실은 미래를 운운하기 부끄럽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싹을 본다. 달구질 소리를 부활시킨 귀농자는 무슨 대단한 능력이나 사명으로 임한 것이 아니다. 마을에 대한 애정과 고인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거시적이고 건조한 농촌회생 정책은 여전히 멀고도 먼 곳에 처박혀 있지만, 저렇게 미시적이고 따뜻하게 마음을 잇고 세대를 잇는 사람들이 있다. 가뭄에 콩 나듯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그 낮은 사람들의 그 작은 마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농업농촌의 희망을 논하기란 어렵다. 아프고 속상하고 분하고 무겁고 슬프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렇게 거기서 존재해주는 사람 하나를 고맙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 특히 세대를 이어갈 젊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지지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마음, 그 마음가짐이 출발이고 암담한 미래를 위한 싹 하나에 대한 예우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