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운 (강원대 EPLC 사무처장/연구교수)
양진운 (강원대 EPLC 사무처장/연구교수)

11월은 김장의 계절이다. 여지없이 무, 배추를 비롯한 채소와 양념값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국민들이 주가보다 야채값 변동에 더 민감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가족도 몇 명(!) 안되고 김치도 많이 먹지 않는다며 궁시렁궁시렁 이유를 대면서도, 절임 배추에 뜨끈한 수육과 매콤한 김치소를 올려먹는 장면이 머릿속에 오버랩 되는 순간 이미 김장준비가 시작된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평상시 ‘친정표’, ‘시댁표’ 김치를 따박따박 가져다 먹었지만, 요때 만큼은 얼굴을 내비쳐야 겨울 내내 맛난 김치를 신나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가족 간에 김장 날짜를 잡는 일이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맞벌이를 하는 세 가정이 한 날 한 시에 모여 김장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가족 간의 신경전에 살짝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한 가정은 출장으로, 한 가정은 시험으로, 또 다른 가정은 아이 병원치료로…. 꽉찬 주말 계획이 시댁에 보고되었다. 김장 덕분에 부모님은 우리 세 가족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농이 지나친 걸까. 어쨌거나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세 가정은 한 날, 한 시 산더미 같은 김치통을 배경으로 맛난 밥상 앞에 앉았다. 이러저러한 가정사로 데면데면하던 사이가 김치에 둘둘 말린 수육과 생굴 앞에서 사근사근해졌다. 김장마법이다.

김장을 마치고 부랴부랴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기간 내내, 식사 때마다 집에 두고 온 김치 생각이 절로 났다. 일정 가운데 암스테르담의 재래시장 ‘드 할렌(De Hallen)’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많은 로컬 로드샵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온 곳이 김치 매대였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으로 달려가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며 김치를 연실 먹었다. 

네덜란드에 이민 온지 10년차인 한국 주부가 독일 배추, 네델란드 무, 한국의 고춧가루로 만든 ‘글로벌’ 김치를 시장에서 홍보하며 판매하고 있다.
네덜란드에 이민 온지 10년차인 한국 주부가 독일 배추, 네델란드 무, 한국의 고춧가루로 만든 ‘글로벌’ 김치를 시장에서 홍보하며 판매하고 있다.

이민 온 지 10년차의 한국 주부가 네델란드 사회로 첫 발을 내딛게 한 것이 바로 ‘김치’란다. 독일의 배추, 네델란드의 무, 한국의 고춧가루가 버무려져 오묘한 맛을 낸단다. 이른바 글로벌 김치다. ‘BTS’에 대한 열광만큼 ‘Kimchi’의 인기도 고공행진이라는 말을 들으니 은근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생긴다. 고국을 떠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그 비싼 김치를 두 병이나 구입하고, 함께 판촉행사도 진행했다. 상상해 보시라! 한국인 여성 둘이 힘을 합쳤는데, 장사 안 될 리가 없다.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를 기약했다.

마음에 찔리는 일이 있어서 고백을 해야겠다. 솔직히 김장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다. 내년부터는 전문가의 손길을 빌리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출장길에서 그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조금 더 김장을 해도 좋겠다. ‘뭐 가족 수가 적다고? 김치를 얼마나 먹는다고?’ 출장 다녀 온 아내의 김치 찬양에 옆지기가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정말 다행이란다. 맛난 ‘가족표’ 김장김치를 내년에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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