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이정배 (문화비평가)

무용공연 가기 전에 반드시 챙기는 물건 중의 하나가 사탕이다. 단것을 좋아하는 까닭도 있지만 심각한 일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공연 도중 갑자기 멈출 수 없는 심한 기침이 나올 때를 가리킨다. 기침을 멈추는 응급처방으로 사탕을 무는 것이 상당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무용공연은 어둠과 고요로 시작한다. 연극이나 음악연주 때는 작은 조명이 무대 위에 비추었다가 배우나 연주자가 등장하면 무대 전체를 밝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무용은 특별한 공연을 제외하고 대부분 조명이 모두 꺼진 어둠 속에서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시작한다. 휴대폰의 작은 불빛이나 진동소리조차 공연을 방해한다.

또 다시 무용스승에게 “연극이나 음악연주 또는 뮤지컬 등의 타 장르 출연자는 문으로 등장하면서 시작하는데, 왜 무용은 어둠 속에서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난 후에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특유의 맑은 눈빛으로 되물었다. “탄생은 어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어둠을 깨고 밝음으로 나오는 것이 예술 아닐까?” 나는 한참 멍하니 무대만 응시했다.

무용이 쉼 없이 움직이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움직임’이란 단어 속에는 ‘멈춤’도 포함되어 있다. 마치 아름다움(美)에는 예쁨도 추함도 모두 포함되듯이 말이다. 동양고전무용이나 한국무용의 특징 중의 하나가 끊어지지 않는 선이라고 하지만,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지속되는 연속 동작 속에서 고요함(靜)과 움직임(動)이 부단히 교차한다.

움직임과 멈춤, 고요함과 움직임이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리듬이 생겨난다. 마치 음표와 쉼표, 음절마디와 이음을 통해 음악의 리듬이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빛만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그 사이에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림자는 빛의 방향에 따라 만들어지는 존재의 어둠이다. 어둠 속에 빛이 비추면 비로소 존재가 드러난다.

객석과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진 완전한 어둠 속에서 무용수들이 무대로 사각사각 등장하여 위치를 잡는다. 무대조명이 밝아지면 안무가가 공들여 창조한 새로운 피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명의 각도에 따라 피조물들은 그림자를 드러낸다. 음악이 깔리고 무용수들의 몸 언어가 시작되면 태초에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의 환희가 온몸으로 감지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폐쇄된 공간 속 어둠에서 모종의 모의를 한다. 새로운 창조를 궁리하고 하나씩 근육을 움직여 만들어본다. 소리가 아닌 숨결로 일체감을 만든다. 무용수와 관객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호흡을 교환한다. 내게 들어왔던 공기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의 리듬 속에서 움직임을 공유한다.

어디선가 잔기침 소리가 들리고 휴대폰의 진동소리가 들린다. 슬며시 가방을 뒤적거려 본다. 행여 손에 걸리는 사탕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오늘은 미처 챙겨오지 못했다. 다행히 모든 소리는 곧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깊은 어둠과 고요 속에서 무대 위 무용수에게 집중한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내 몸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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