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모 (춘천방사능생활감시단 회원)
양창모 (춘천방사능생활감시단 회원)

그는 요즘 잘 자고 있을까? 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의 5배가 넘어간다는 방송이 며칠 전 보도된 후로 그는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을까. 5년 전 내가 살던 아파트의 방사능 수치가 높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던 순간이 떠올려지면서 마음이 쓰였다.

얼마 전 “다른 길이 있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얼어있는 겨울 강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였다. 얼은 강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얼음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 요 며칠 그의 귀에는 아마도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 단단한 얼음같이 굳건하리라 믿었던 세계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지난 5년간 춘천방사능생활감시단의 활동은 또 다른 얼음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얼음 같은 대중의 무관심과 철벽같은 시의원과 공무원들의 무시를 견디며 매달 모임을 해나갔다. 장터에 나가 피켓도 들고 시의원을 찾아가 호소도 하고 강연회를 하고 영화제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그 얼음이 깨어지는 소리는 마침내 무관심과 무시로 둘러싸여있던 춘천의 얼음장 같은 세계에 균열이 가는 소리로도 들린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지난 5년간 어떤 시간을 견디었던가. 오늘은 몇 명이 올까 마음 졸이며 강연장으로 들어설 때 세 명이 덩그러니 앉아 있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제목이 늘 헷갈렸다. 다른 길‘은’ 있다? 다른 길‘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감독이 ‘다른 길은 있다’라고 단정적으로 힘주어 말하지 않고 ‘다른 길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나도 어쩌면 그에게 ‘다른 길은 있다’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거리도 집도 사무실도 학교도, 춘천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어딜 가나 우리는 높은 수치의 생활방사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밥벌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소중한 인간관계들이 이곳에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번도 더 떠나야 하나 고민했던 나조차도 실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다른 길이 있다고. 지금 지어지고 있는 저 고층 아파트들과 집들만큼은, 아이들이 있는 학교만큼은 적어도 바꿀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먼저 들었던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전세금을 빼고 나올 때 그 집에 살기위해 집을 보러 왔던 분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게 너무 미안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내 앞에 서 있다.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는 한 그는 늘 내 앞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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