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휴일 오후. 유혹에 기꺼이 굴복해 낮잠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나는데 뜬금없이 ‘인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난감한 마음에 사전을 찾아보니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과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말 ‘삶’은 ‘태어나서 죽기에 이르는 동안 사는 일’이란다. 정말 태연무심(泰然無心)한 정의다.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과정은 이미 주어졌고 받아들인 것이지만 ‘살아가는 일’과 ‘사는 일’이 켕긴다. 인생은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 자신이 무언가를 들여놓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걸 과업으로 받아든 사람들은 정초가 되면 저마다의 인생에 무엇을 들여놓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개는 작심삼일로 사라질 운명이지만 시작은 창대한 꿈 혹은 계획이다. 꿈은 계획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물컹물컹한 욕망이고 계획은 꿈을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내 정교하게 만든 욕망이다. 현실을 도피한 꿈은 미래로의 도피로 중독을 부르고, 의지가 받쳐주지 않는 계획은 파도에 쓰러진 종이배처럼 해안가를 맴돌다 난파한다.

나는 꿈의 편이다. 비상사태(Plan B)에 처하지 않은 한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은 계획이 주는 무료함과 꿈이 죽어가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교사로 근무하는 내내 나는 꿈을 이야기했고 학생들과 학부모, 동료와 학교는 계획을 이야기했다. 우린 서로에게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내가 그들을 가엾게 여긴 반면 그들 중 일부는 나를 부러워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삶이 시시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편집기자가 되었다. 학생들에게 영어만 가르치던 내게 신문을 편집하는 일은 가슴 뛰는 일이다. 편집 마감을 하고 인쇄소로 넘기는 금요일이면 가슴은 뛰다 못해 폭발할 만큼 다이내믹하다. 반복이 주는 교훈일까, 이제는 그런 충돌도 밥벌이의 지겨움을 상쇄시키는 흥미진진함이거니 하고 받아들인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사는 동안 따랐다는 원칙을 적용하면서 내 삶은 단순해지고 있다.

“최악에 대비하고 최선을 기대하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라.”

꿈꾸는 자는 꿈을 나눌 수 없어서 외롭고, 계획을 세우는 자는 자신조차 믿을 수 없어서 외롭다. 이왕이면 꿈으로 외롭기로 했다. 구체적인 목표가 담긴 계획은 모두 버렸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꿈이 외롭지 않도록 별을 자주 쳐다보기로 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아름답다면 묻지 않기로 했다, 유의미한지 무의미한지조차도.

린유탕(林語堂)의 수필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한 대목처럼 올해는 하루를 허비하면서 ‘소확행’을 챙겨보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걸로 만족한다.

일을 잘 마무리하는 훌륭한 기술도 있지만, 일이 그대로 진행되도록 내버려두는 고상한 기술도 있다. 삶의 지혜는 비본질적인 것을 없애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분주하지 않고, 분주한 자는 지혜로울 수 없다. 정말로 쓸데없는 오후를 완벽하게 쓸모없는 방식으로 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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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꿈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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