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로 ‘마음의 집’을 짓는 이경애 씨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블로그에 일기처럼 시를 올렸어요. 가난한 엄마라 물려줄 재산도 없고 그간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며 살았던 마음의 집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세상을 떠나도 아이들이 엄마의 집을 드나들 듯 그렇게 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이경애 시인
이경애 시인

먹고 사는 일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처럼 고단한 삶이었다. 밧줄에 함께 매달린 어린 자식들과 한 고비 두 고비 넘기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숨조차 한번에 크게 내쉬지 못했다.

그렇게 혼자 뱉어낸 넋두리가 시가 되었다는 《견고한 새벽》의 이경애(59) 씨를 만났다.

《견고한 새벽》은 이경애 씨의 시를 눈여겨보시던 블로그 이웃이 펀딩을 제안해 세상에 나오게 된 그의 첫 시집이다. 

블로그 이웃은 1천 9백명에 달한다. 하루 백 여명이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시집을 구입해 읽고 포스팅을 올려주어 입소문을 타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도 출연했다.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난 시인은 할머니와 함께한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제비꽃>

하얀 서리꽃 뒤집어쓴 할매는 손수 태를 자르던 날부터 가시내를 고였다. 

불면 날세라, 쥐면 꺼질세라... 왼 손에 십리 사탕 한 움큼을 들고도 뜨거운 오뉴월 해 아래 국화빵 누런 봉투까지 싸 들어야 서운치 않던 손주딸은 풍류꾼 아비가 징그럽게 싫고 남정네 간수 하나 못 해 첩살림 묵인하는 어미는 더 싫고 이래저래 오롯이 할머니만 치댔다. 

태중에 간간히 맛본 눈물 탓인지 보기에 그럼직한 화사하고 빛 고운 것 보다는 그늘지고 서늘한 것에 더 눈길이 가던 가시내는 저만치 애련한 제비꽃을 유독 좋아라했다. (중략)

너웃너웃 해 그림자 샛강을 넘을 때면 할매는 애가 끓어 손주딸을 찾아 나서고 (중략)

시는커녕, 일기도 제대로 못 쓰는 게으른 일상을 보란 듯이 살아가지만 가끔 하늘이 징허게 슬픈 날이면 그래도 차마 못 잊어, 제비꽃 듬성듬성 피어난 솔밭 사이, 청보라 흐르는 길을 혼자 걷는다.

마을 훈장이었던 할아버지, 늘 붓을 들었던 할머니 슬하에서 그녀도 글공부가 좋았다. 곡성에서 할머니 품 같은 들을 보며 살았던 어린 시절은 그녀의 문학적 자산이자 일상에서 지친 맘을 보듬어주는 치유의 곳간이었다. 

“어느 겨울, 눈 내리는 허허벌판을 지나는 상여의 요령소리를 따라 간 적이 있어요.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였지만 상여소리에 홀려 누군지도 모를 망자를 생각하고 그 예를 다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늘하면서도 좋았어요.”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중·고등학교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외롭고 우울한 날들이었다. 대학생활은 길지 않았다. 국문과를 다니던 그녀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끌려갔다. 한자리 하는 친척 덕에 어렵사리 나왔지만 모든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던 몇 년의 방황, 사랑하는 이를 저세상에 떠나보낸 후 또 몇 년, 그녀의 방황은 길었다. 가끔 혼자 기차를 타고 춘천의 카페 ‘이디오피아’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과 고요한 호수의 물결은 그녀를 춘천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서른 즈음, 남자를 만났다. 세상을 떠나보낸 첫사랑이 돌아온 듯 직업도 같은 군인이었다. 연애는 달콤했고 그녀는 아픔을 잊을 것 같아 결혼을 결심했다. 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만났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밖으로만 도는 남편에게도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사업을 벌려놓은 남편의 뒷수습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형편은 극한으로 치달았고 빚더미와 함께 신용불량자 딱지가 붙고 아이들을 위자료로 받았다. 친척집에 맡긴 아이는 분리불안 증세로 먹으면 토하고 죽으로 1년을 연명했다. 떠나버린 아버지와 생활고를 알아차린 큰 아이가 티비를 보며 “우리도 버려져요?” 라고 던진 말은 가슴을 후벼 놓았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병아리들이었다. 이 시인과 인터뷰어의 눈이 젖었다. 

품에 끌어안은 아이들의 눈동자는 어둠속 망망대해에서 깜빡이는 등불이었다. 그녀는 그저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당장 내일 한 끼가 걱정이었죠. 일주일을 8일처럼 살았어요. 신용불량자가 취직할 정규직은 없었죠. 식당, 편의점, 영업 등의 알바를 전전했어요. 매달 돌아오는 이자와 이것저것 고정비용을 떼고 나면 푼돈도 남아있지 않았죠. 30년 가까이 춘천에 살았어도 친구는 단 한명이에요. 제가 소극적이기도 하지만 한눈팔 시간이 없었어요. 할머니는 ‘사람은 재 너머 여우가 돌아봐야 산다’고 말씀 하시곤 했어요. 절박하지만 절망은 없었어요. 제 삶을 구겨진 종이처럼 함부로 던진 적은 없었죠. 종교는 없지만 어딘선가 저를 지켜보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자신을 중심에 두되 목표가 괴물이 되는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되 삶을 즐겨라. 하나를 가지면 반은 나누고 둘을 가지면 하나를 버려라. 그녀가 평소 아이들에게 주문하는 지침이다. 이제 아이들은 성년이 되었고 엄마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시집 '견고한 새벽' 표지
시집 '견고한 새벽' 표지

<빨래>

무릎이 튀어나온 내 츄리닝 옆에
아들놈 츄리닝을 넌다 
인심 쓴 눈대중으로도 
석 자 가웃 남짓이나 될까 싶은 
세월의 마디와, 허리춤 
바짝 틀어쥔 유전의 치수 
헐거워진 틀니처럼 낡아버린 
내 바짓단 밖으로 춥게 
터져 나온 실밥들을 토닥이는 
아들의 마른 다리 
초유도 먹이지 못한 유선이 찌르르 
땡긴다. 

내 속에서 나와 칭얼거리던 것이 
나머지 생은, 지가 
다 걸어주겠노라는 듯 껄렁거리며 다 
삭아내린 어미의 발목을 
툭, 툭 친다 

이경애 시인의 교양강좌 모습
이경애 시인의 교양강좌 모습

밤마다 그녀는 넋두리를 꾹꾹, 뚝뚝 남겼다. 나를 향한 질문과 반성과 사색과 대화의 시간이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쓰게 된다.

“넋두리가 승화되어야 하는데, 저는 아직 넋두리 수준이에요. 시집을 내고 나니 더욱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저에게 시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저는 아직도 저를 알아가는 중이에요.”

조용히 미소 짓는 목소리가 저녁 종처럼 깊었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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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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