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정(라온오케스트라 단원)
홍옥정(라온오케스트라 단원)

음악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무렵 거의 매일 라이브연주로 듣던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에 머문다. 학교 내 관사에서 심심한 유년 시절을 보내던 나의 주된 놀이터는 방과 후에 피아노교습이 이루어지던 학교의 피아노교실이었다. 그곳에서 재학생 언니들이 피아노 배우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구경하다가 레슨이 뜸해진 틈을 타 선생님께 소녀의 기도를 쳐달라고 부탁하면 선생님은 얼른 나를 무릎에 앉히고 풍성한 터치로 피아노 건반 위를 내리달리기 시작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옥타브와 아르페지오의 구간을 지나 두 손이 교차하는 29마디다. 선생님의 왼팔이 오른팔을 넘어 피아노의 높은 건반으로 이동할 때 내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도록 과장되게 움직였다. 그러면 그의 두 팔에 낀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스꽝스럽게 움직였고 나는 그게 재미있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소녀의 기도 놀이’는 자연스럽게 나를 음악으로 이끌었고 34년 동안 피아노를 가르치는 삶으로 이끌었다.

2개 층으로 이뤄진 음악학원은 피아노와 노래, 각종 악기소리로 활기가 가득했었다. 후평2,3단지 재건축으로 인한 학원주변의 공동화, 이명박정부의 영어몰입교육열풍, 각종 영재교육과 초등부터 시작되는 특목고준비 등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부족한 악재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었을 때 늘 음악이 흐르는 음악애호 가족으로 만들고자했던 나의 꿈에 위기가 엄습해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10년 전 겨울, 영하의 얼어붙은 날씨에 나는 피아노연습실의 한 층을 뜯어 어른들의 음악놀이터 아마추어오케스트라의 연습장을 마련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해주던 은선, 중열, 민정 샘. 어른 수강생인 희경, 경아, 은정,기선 샘. 음악 도서점을 운영하는 노흥식 사장과 김기유 씨가 악기 하나씩을 들고 오케스트라 창단에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탄줘윙의 베스트셀러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속에 들어있는 ‘악기하나 배워보기’의 글귀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해 가을 방영된 ‘베토벤 바이러스’의 제목을 인용하여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된 분들을 찾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포스터를 종합병원에 붙이고 다음카페를 개설했다. 문병을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포스터를 봤다며 첫 전화를 걸어온 호정이는 첼로전공을 고민했던 실력자였다. 남편의 입원 중 단원모집을 보고 전화했는데 ‘노인도 받아주나요?’ 하던 애선 왕언니는 결혼 후 처음으로 30년 만에 첼로를 잡았다. 매번 연습에 참석하기는 어렵다며 조심스럽게 문의하던 지연 샘도 창단멤버가 되었다. 

카페검색으로 합류의사를 전하며 연습실이 어디냐고 묻던 이는 길 건너편  안과의 태동 샘이었다. 고향을 떠나 춘천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던 세희 샘은 대학시절 교내오케스트라활동을 했던 경험자로 초대악장을 맡아주었다. 이름없이 시작된 아마추어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우리는 ‘즐거운’이란 뜻의 우리말 ‘라온’을 붙였다. 베토벤바이러스의 ‘똥덩어리들’이 아닌 단원이 주체가 되어 모두가 즐거운 음악모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춘천에 오래있을 것 같지는 않다던 세희 샘은 동료교사와 짝이 되고 예쁜 아가를 낳고 7살로 키워내며 아직도 ‘라온 중’이다.  라온오케스트라의 자랑 한 가지는 가족이 함께 활동한다는 점이다. 고모를 따라 단원이 된 지현, 지윤이. 엄마와 함께 활동한 시우, 시온이, 하윤이, 수지. 현재 엄마와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3이 되는 민재까지 이들 모두는 음악을 공기처럼 향유하는 우리단체의 예쁜 상징이다. 

 10년의 시간동안 많은 인연이 ‘라온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평생 함께할 진한 우정들이 맺어지고 있다. 

나는 지난해 단장 직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평단원으로 함께한다. 내게 오케스트라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사람들 간의 정(情)이다. 어느 곡을 연주하든 어디에서 연주하든 좋은 사람들과의 연주는 그래서 기쁘고 즐겁다. 

새해에는 후평동의 ‘라온오케스트라’처럼 동네마다 음악동아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직 악기와 인연을 맺지 않은(혹은 못한) 춘천사람들이 대상이면 더욱 좋겠다. 올가을 열리는 ‘라온오케스트라’ 10주년 정기연주회의 때 이른 초대장을 건네며 나의 음악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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