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breakfast. 아침식사. break(깨다)와 fast(단식)가 결합된 단어다. 어원으로 보자면 밤 동안의 단식을 깨는 것이 아침식사라는 얘기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침마다 (먹든 먹지 않든) 대하는 이 단어에서 정작 어원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간밤의 비움을 채우면서 기꺼이 먹는 아침식사가 아니라 간밤에 채운 폭식으로 인해 걸러도 되는 거치적거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가히 풍요로움의 저주라 할만하다. 

그 저주의 제1원흉은 친구와 함께한 간밤의 술자리이고 안개가 유혹한(타지에선 춘천에 대해 그렇게 믿는 이들이 많다) 야식이다. 그렇게 쌓은 정(情)은 소리 소문도 없이 올챙이배와 군살로 나타난다. 늘어지게 단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기지개를 켜며 모처럼 체중계에 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사달이 났음을 알게 된다. 체중계의 바늘을 따라가는 눈빛이 흔들린다. 이미 과체중이다. 

적정체중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한다.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렸는데 발 끝이 온전히 보이지 않고 발가락 열 개를 찾으려면 공손히 허리를 숙여야 한다. 발톱 깎기가 손톱 깎을 때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건 또 어떤가.

“나는 사람의 몸매에서 그의 태도를 본다.” 어느 책에서 본 글이다. 어쩌면 다이어트가 인류 최후의 모험이 되어버린 시대를 반영한 진실인지 모른다. 눈빛으로 삶의 태도(attitude)를 판단하던 시선이 몸의 맵시나 모양새로 확장되었다는 것인데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육체에만 머물던 시선이 정신으로 확대된 의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육체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정신의 고상함과 우아함까지 몸매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은 통찰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매끈한 각선미를 좇지만 참살이에 대한 욕망은 균형미에 담긴 절제를 본다. 시대와 경쟁하는 삶은 피곤하다. 질주는 맹목적이고 가차없기 때문이다. 시대와 갈등하는 삶이 그나마 견딜만하다.

뱃속이 더부룩하고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아침은 우울하다 못해 참담하다.  바라건대 밤에 비우고 아침에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달빛 아래 고요히 비운 육체를 땡볕의 정신으로 채우지 못한다면 그 또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여하튼 밤과 낮에 어울리게 내 몸을 비우고, 채우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내 몸매에서 나의 망가진 삶의 자세를 본다는 것은 불편하다. 그 사실을 거울 앞에서 스스로 확인하는 일은 더욱 불편하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을 잡는 일이 인류 최후의 모험이라면 슬프지 않은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1859년 2월 25일에 쓴 일기를,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아침이다.

아침과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체크하라. 당신 속에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의 기대로 마음이 설레어 잠을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면, 첫 파랑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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