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수년 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내 가슴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를 들었다.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가 수학에 대한 어떤 특별한 교육도 받지 않고 다만 취미로 수학을 연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300년 이상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채 남겨진, 말 그대로 ‘최후의 문제’ 중 하나였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완벽하게 증명한(1994년) 앤드류 와일즈(Andrew Wiles)의 정진은 매혹적이었다. 수학자였던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Apostolos Doxiadis)가 쓴 수학소설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은 실패한 앤드류 와일즈의 이야기에 가깝다. 나로 하여금 (환생할 경우) 수학자를 꿈꾸게 했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 유명한 골드바흐의 추측이다. 4=2+2, 6=3+3, 8=3+5, 10=3+7(5+5), 12=5+7, 14=7+7, 16=3+13(5+11), 18=5+13(7+11), 20=3+17(7+13)……. 가설의 내용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이 가설을 세운 크리스티안 골드바흐(Christian Goldbach, 1690-1764)가 만 단위의 자연수에 대해서 입증했고 슈퍼컴퓨터는 400조까지도 성립한다고 확인했다. 그런데 아직 수학적으로 일반증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리(theorem)’가 아니라 여전히 ‘추측’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삼촌 페트로스는 열아홉의 나이에 베를린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듬해 수학교수가 된 수학천재였다. 그러나 첫사랑에 실연을 당하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수학자로 성공하여 그녀를 감동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지만 그런 시도의 대가는 가혹하다. 괴델이 정신병에 걸리고, 라마누잔이 요절하고, 앨런 튜링이 자살했듯이, 페트로스도 풀릴 듯 풀릴 듯한 문제에 미쳐 인생을 망쳐버린다. 성과가 없으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는 한낮 쓸모없는 사람으로, 재능을 낭비한 실패자로 치부되어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것에 실망할 권리가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타인의 평가를 단호히 거절하고 도전하라는 외침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청춘은 얼마나 될까. 아니, 저렇게 외치는 자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가정은 또 얼마나 될까. 대입에 실패한 아들딸은 고개를 떨구고, 취업의 바늘구멍을 뚫지 못한 청춘은 절망으로 비틀거린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은 사실 자신의 실패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실패할 권리가 없고 성공할 의무만 존재하는 가정과 사회분위기가 만든 것이다. 성취 가능성을 기준으로 목표를 세우고, 성취 여부로 결과를 판단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할까?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사람이 있고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는 사람이 있다. 누가 더 행복한지를 대신해서 판단하지는 말자. 난제 해결에 일생을 걸었던 페트로스가 숨을 거둘 때 보였던 그 짧은 미소를 기억하자. 미지수를 찾아 걷다가 넘어진 청춘들이 툭툭 털고 일어나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사회, 정녕 우리에겐 금단의 열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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