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하는 경찰관 김명래 경감

춘천시 신동면에 위치한 연화마을 요양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30분. 휠체어를 굴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할머니들을 따라 3층 행사장으로 올라갔다. 일찌감치 도착해 마이크 테스트를 하고 있는 김명래 씨는 한눈에 봐도 경찰임을 알 수 있었다. 훈장이 촘촘히 달려있는 깔끔한 경찰 정복차림을 한 그가 행사장에 일찍 도착한 노인들을 향해 마이크를 들었다. 제복차림이었으나 표정은 천사같이 해맑은 모습인지라 보통의 경직된 경찰관의 인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명래 경감
김명래 경감        사진=이철훈 시민기자

“아직 행사시간이 좀 남았는데 심심하실 테니 노래 몇 곡 들려드릴게요~”

엠프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트로트반주에 맞춰 구수한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돋우는데 그 실력이 웬만한 가수 못지않다. 여유롭게 진행하는 무대 매너에선 오랜 경험이 묻어난다. 하긴 2011년부터 시작된 그의 색소폰 공연이 지금까지 무려 230여회에 이를 정도니 그럴 만도 하다. 그가 노래를 부르자 어르신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깨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픈 몸에 거동이 힘든 그들에게도 노래와 음악은 큰 위안이 됨을 알 수 있었다.

김명래 경감은 현재 춘천경찰서 청문감사실 부청문관으로 근무중이다. 그는 카투사로 군복무를 마친 후 경찰이 되었다. 그의 봉사활동은 1999년 신북파출소 근무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경사로 진급하며 월급을 10만원 더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을 뜻 있는 일에 보태고 싶었다. 발산리 지역을 순찰하며 알게 된 노인 몇 분에게 10만원어치의 반찬을 사서 나눠드리며 시작한 일이 오늘의 봉사활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이후 청소년 야학, 청소년 농가정 돌보기 등 봉사는 그의 일상이 되었다. 

“색소폰은 아들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연주하다보니 어르신들과 놀아드리고 싶어 계속 배웠고요. 어르신들은 손만 잡아드려도 표정이 달라지거든요.”

직업정신이 깃들여진 간단하고 명료한 그의 대답이지만 어르신에 대한 생각이 깊게 깔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 참전용사로 실명하게 된 아버지가 오랜 기간 요양시설에 머물게 되면서 노인시설은 그에게 익숙한 공간이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봉사로도 이어졌다.

“1965년 강원도 홍천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실명을 하신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고 가정형편도 넉넉지 않았죠. 어려워 봐서 어려운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뿐 이예요. 경찰이다 보니 어려운 사람을 더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봉사도 자연스럽고요.”

카투사 시절 미군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경험했다. 그때의 문화충격이 내향적인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해 주었다. 

하지만 경찰관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2년간 진급에서 누락되던 시절도 있었다. 설상가상 건강이 악화되어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을 때 그는 신앙에 의지하게 되었다. “벌어서 남 주자”라는 설교에 깊이 감동받아 다시 일어섰다. 배드민턴을 시작하며 건강을 되찾고, 봉사활동에 박차를 가하며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그 열매는 2017년 대한민국 인권상, 2018년 강원목민대상 수상으로 나타났다.

“높이 올라가려 할 때는 오히려 안 되던 일들이 아래에 내려오니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말 다 내려놓았어요. 그 후 상도 받게 되고 감사한 일들이 자주 생겼습니다.”

강원도는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비율이 높다고 했다. 사각지대에 놓인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주변의 어르신들에게 주간 보호시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노인시설이용을 적극 권장했다. 오랜 봉사기간 동안 그는 이미 노인전문가가 된 듯 보였다.

현재 그는 춘천시 신북면에 500평 정도의 농장을 갖고 있다. 고추, 상추 등 채소를 길러 남들에게 퍼주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을 심어놓고 20여명 정도 같이 식사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고 했다. 늘 사람이 좋고 모이는 게 좋다는 그는 자신의 친화력이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경찰생활 29년째인 그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경찰은 범죄자에게는 강해야 하지만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뒤 바뀔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법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다시 사회로 적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런 배려를 할 수 있는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김명래 씨는 한울타리 색소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성골롬반의 집, 연화마을, 시립양로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이철훈 시민기자
김명래 씨는 한울타리 색소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성골롬반의 집, 연화마을, 시립양로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퇴직 후에는 그동안 틈틈이 공부해서 준비한 청소년 상담사, 학교폭력상담사. 가정상담사 자격증 등을 활용해 무료상담소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한울타리 색소폰 동호회를 운영하며 성골롬반의 집, 연화마을, 시립양로원 등에서 무료봉사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연을 만들면, 제가 만든 연이 가장 높이 올라갔어요. 균형을 잘 잡았기 때문이죠. 팽이도 잘 만들어 오래 돌았고요. 그래서 동네 친구들의 연과 팽이는 제가 다 만들어 주었어요.” 

어릴 때부터 남들이 좋아하는걸 보며 기꺼이 나눠주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기자의 모친이 머무는 주간보호복지센터에서도 공연 한번 해 줄 수 있냐며 슬쩍 말을 흘리자 흔쾌히 허락한다. 봉사에 더해 든든한 느낌마저 풍기는 그에게서 민중의 지팡이라는 이미지를 읽었다면 과장일까?

봉사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 가족들이 불평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오늘도 아내가 챙겨준 음식 80개를 들고 왔어요. 아내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예요.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점점 아빠를 닮아 가는지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민요도 배울 예정이라고 했다. 그의 공연 프로그램이 더욱 다양해질 것 같다. 괜스레 마음이 기쁘다.    

편현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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