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궁의 역사적 의미와 춘천에 남은 일제 잔재’ 세미나 열려
“일제의 신사, 세종호텔로 남아… 잘못된 역사 되풀이 되지 않길”

조선 후기에 건립된 고종의 이궁을 파괴하며 들어선 신사는 여전히 세종호텔 부지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일제에 의해 사라진 춘천이궁의 역사적 의미와 춘천에 남은 일제 잔재’를 주제로 개최한 학술세미나가 지난달 27일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열렸다. 

지난달 27일 한림대학교에서 ‘일제에 의해 사라진 춘천이궁의 역사적 의미와 춘천에 남은 일제 잔재’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 세미나.
지난달 27일 한림대학교에서 ‘일제에 의해 사라진 춘천이궁의 역사적 의미와 춘천에 남은 일제 잔재’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 세미나.

‘춘천이궁의 설치배경, 변천과정 및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발제한 연세대학교 오영섭 교수는 “춘천은 산골 속 작고 쇠잔한 마을이었는데 춘천부에서 유수부로 확대 건립된 사건이 춘천이 강원도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라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춘천은 평야가 좁고 산악으로 둘러싸여 전쟁 시 피난처로 적합하다는 논의가 고종에게 보고됐다. 당시 고종은 “춘천은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험해 그곳에 유궁(잠시 머무르기 위한 궁)을 설치해 유사시 사용하겠다”라고 말하면서 1888년 초대 춘천유수 김기석에게 춘천유수부와 이궁을 짓도록 했고 약 3년 후인 1890년에 건립됐다.

학자가 아닌 활동가로서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오동철 사무국장은 ‘이궁에 들어선 일제 침략신사와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를 주제로 발표했다. 오 사무국장은 “일제 신사가 생기고 이궁이 사라지는 과정과 친일 청산 과정을 돌아보면서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길 바란다”고 발표 목적을 밝혔다. 1916년부터 3년간 춘천 신사가 세워지며 이궁의 좌측편이 사라졌다. 일본 패망 직전까지 전국의 신사는 1천142개에 이르며 일제는 지속적으로 춘천 이궁을 없애려 했다. 1919년에 완공된 춘천 신사는 1938년 그 지위를 명확히 하려 강원신사로 개칭되고 1941년 전국 8개 중 4번째 ‘국폐소사’로 격상됐다. 신사 건립이후 춘천 이궁 중 ‘문소각(고종의 침전)’과 ‘조양루(이궁의 주 출입구)’ 위봉이 남아 있었으나 도청 건립을 위해 1938년 조양루는 우두동으로 이전됐고 1940년 2월 22일 발생한 화재로 문소각은 소실됐다.

이어 오 사무국장은 현재까지 이궁을 허물고 들어선 일제 신사가 ‘세종호텔’로 남아있는 연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신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그해 11월 폐지됐다. 이를 ‘춘천부립도서관’으로 설립하자는 ‘소양학술연구회’(단체기록 남아있지 않음)의 노력으로 철거되지 않았고 6·25전쟁 이후 1956년 강원관광주식회사로 넘어가며 민간이 소유하게 됐다. 이 사실을 두고 오 사무국장은 “이렇게 부역자들은 잔재를 숨기려 했고 잔재 청산을 원하는 이들은 부역자들의 치밀한 의도를 간파할 힘이 없어 일제 잔재 청산은 안 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을 것”이라 말했다. 

발제 이후 강원대학교 이경수 교수가 좌장으로 진행한 자유 토론에서는 강원대학교 홍성익 강사와 A&A문화연구소 심준용 소장이 지정토론을, 한림고고학연구소 심재연 연구교수와 춘천학연구소 허준구 소장이 자유토론를 했다. 토론에서는 복원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시민의 관심과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먼저 이루어지고 난 뒤에 생각해보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수렴됐다. 

한 시민은 세미나에 끝까지 남아있는 공무원이 도에서 나온 한 명 뿐임을 지적하며 “좋은 세미나가 우리들만의 리그에 그칠까 우려된다”면서 “오늘 발제 중 일부만 사실이라 해도 시민운동으로 키워나갈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세미나에 참석한 강원도 최문순 도지사는 주제발표 전 인사말을 통해“이번 학술 세미나를 계기로 한반도에 부는 통일 바람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전통 문화유산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복원하는 발걸음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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