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개인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헛헛해서 그럴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명산을 오르고 유럽여행을 다녀도, 해소되기는커녕 더 증폭되는 정신적인 헛헛함이 있다. 그 이유를 묻고 배우려는 노력에 인문학은 통찰을 건네준다. 

인문은 천문과 비교해 보면 좋다. 모름지기 천지자연이 그린 무늬인 천문이야말로 최상의 경지다. 천문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문이란 천문의 경지를 흉내 내려는 시도다. 진정성 가득하고 너무도 적절해서 궁극의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는 경지, 즉 진선미(眞善美)를 가이드로 삼는다. 그런데 인문은 불완전한 인간과 공동체에 무늬를 그려내야 하니 어렵고도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인문학 자체가 목표일 수 없다. 인문학이라는 가공되어 누적된 언어 저 너머에 있는 ‘사람들(人)이 그린 무늬(文)’가 목표다. 우리의 헛헛함을 채워줄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을 거쳐서 만나는 인문이다. 인문은 단순할수록 아름다운 무늬가 되고, 아름다울수록 단순하다. 인문은 사랑하고 정의롭고 평화롭고 협동하는 삶의 단순성으로 안내한다. 넓고 평탄한 길이다. 

인문은 크게 두 흐름으로 갈라진다. 공동체적인 시도를 긍정하고 최대한 넓히려는 흐름이 있고, 개인적인 시도를 긍정하며 최대한 좁히려는 흐름이 있다. 전자는 공자·칸트·마르크스 류(類), 후자는 장자·니체·명상수련 류(類)다. 이 두 흐름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같이 흐르며 만났다가 또 갈라진다. 마찬가지로 귀농에도 크게 두 흐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귀농은 공동체적인 시도와 만난다. 농촌공동체가 아무리 와해되었다 해도, 공동체의 역사와 자취는 남아있다. 나아가 공동체적인 시도들도 끊이지 않는다. 작목반·영농법인 등의 농업적 시도가 있고, 동계·부녀회·농촌유학·마을공동체 같은 농촌형 시도가 있다. 농민회 같은 농민적 시도, 푸드 플랜 같은 종합적인 시도도 있다. 잘 되지도 않고 나날이 위협을 당하더라도, 이러한 시도들과 귀농이 만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통해서 귀농은 더욱 넓어지고 농민 또는 촌사람을 닮아간다. 이런 귀농은 인문적이다.

또한 귀농은 개인적인 시도와도 만난다. 밭에서 박박 기어 다니고 가뭄에 어렵사리 물을 댄다. 멧돼지에 피해를 입고 수확 철에 큰 비를 만나기도 한다. 농사는 어려운데 별은 왜 그리 많고 달빛은 왜 저리도 밝은지. 귀농은 이런 자연과의 만남과 충돌 속에서 수없이 많은 깨우침을 얻으며 점점 농민의 원형을 닮아간다. 이를 통해서 귀농은 더욱 깊어지고 땅의 사람이 되어간다. 이런 귀농도 인문적이다.

그런데 최근 제3의 귀농 흐름이 출현했다. 인문의 최고봉인 농(農)과 선을 긋는 것부터 어쩐지 의심스럽다. 이 귀농은 때로 스스로를 귀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농촌에서 창업자라고 불리는 걸 선호하기도 한다. 여기저기로 돈이 되는 농사를 찾아다니고, 투자가치가 있는 땅을 찾아다닌다.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니거나,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곳을 찾아다닌다. 농민들과 거리를 두면서 농업을 시도하고, 촌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끝끝내 촌에 살고자 한다. 공무원·컨설턴트들이 하는 교육은 엄청나게 찾아다니지만, 평범한 농민은 얕잡아 보고 허름한 촌사람의 말은 허투루 듣는다. 

이러한 귀농 흐름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문적이지는 않다고, 툭 한마디는 할 수 있다. 무늬가 진실하지도 바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면 인문적이지 못한 것이다. 욕망이나 허위로 안내하는 인문은 없다. 혹시 도시의 욕망을 그대로 농촌에 이식하는 식의 귀농·귀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것이 인문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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