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라온오케스트라 단원)
백경미 (라온오케스트라 단원)

달빛이 향으로 번지면 이럴까? 

짙은 청록에 하얀색을 조금 풀어 넣은 빛깔의 향.

백매(白梅)가 막 벙그러진 매화 밭엔 꽃몽오리 빛깔을 닮은 향이 가득하다. 깨끗하고 맑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꽃, 구슬처럼 알알이 맺힌 매화 봉오리 사이에 말간 얼굴을 내밀고 피어있는 매화송이와 눈을 맞추며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달을 바라보며 기원을 올리던 여사제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가득 차오른다.  

순결한 여신이여, 당신은 이 신성하고 아주 오래된 나무들을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우리에게 구름도 없고 베일도 쓰지 않은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소서. 진정시켜주소서 타오르는 마음을, 진정시켜주소서 도전적인 열정을, 뿌려주소서 땅 위에 평화를, 당신께서 하늘에 그렇게 한 것처럼...

줄거리가 있는 음악 오페라. 그 중에서도 서정성이 가득한 드라마틱한 오페라를 꼽으라면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가 아닐까. 노르마는 드루이드(Druid)교의 여제사장이다.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서약을 했음에도 로마군 사령관 폴리오네와 비밀리에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인 그녀에게 드루이드교의 수장인 오로베소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자고 백성들을 설득해 노르마에게 달의 신탁을 부탁한다. 자신의 연인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 속에 달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녀의 아리아 ‘Casta Diva’는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다. 

벨칸토 창법의 기술을 모두 알아야하고, 카리스마와 부드러움, 그리고 처연함과 결연함, 국가와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두 개의 심리적 오묘한 감정을 목소리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야하는 난이도 높은 곡. 오페라 “노르마”의 ‘Casta Diva’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단연 최고다. 

오페라 초연 당시 소프라노 가수가 이 아리아를 너무 어려워해서 음을 낮춰 주어야 했고 곡에 담긴 감정을 잘 소화 하지 못해 별로 시선을 끌지 못했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오페라의 재탄생으로 이어졌고 이 곡을 오페라의 선두 대열에 올려놓았다. 지금도 소프라노 가수들의 로망은 "노르마"를 칼라스처럼 부르는 것이라고 하니 그녀의 “노르마”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전혀 다른 해석과 완벽한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목소리로 평정한 소프라노. 그녀가 바라보았던 달의 빛깔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튼 지금 나는 모든 줄거리와 상황을 다 내려놓고 매화가 마구 피어나는 아무도 없는 산 중턱의 꽃나무들 사이에서 은은한 달빛을 닮은 그 아름다운 향기 속을 천천히 유영하며 마리아 칼라스의 음성으로 '정결한 여신'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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