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할아버지’ 김용기 신북읍 번영회장

한 사람의 생을 과거로 함께 거슬러 올라가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살아낸 생의 소회를 듣고자 함만은 아닐 것이다. 김용기 씨와 만남도 그랬다. 그는 40대에 할아버지가 된 탓에 젊은 할아버지로 불린다. 주민자치의 뜻이 모여 지역 발전을 위해 공론하는 거주민 자생조직인 신북읍 번영회 회장이기도 하다.

 

카메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영락없는 우리 이웃에 흔한 아저씨다.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함께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였을 것이다. “글쎄요, 뭐 별나게 할 말이 있어야지요.” 말끝을 흐리면서도 웃음 주름이 자글거리는 그의 눈매가 어느새 깊어지고 있다. 그가 스스로 살아낸 생의 기억들을 불러 모으는 중이라는 것은 금세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젊은 할아버지’ 김용기 신북읍 번영회장
‘젊은 할아버지’ 김용기 신북읍 번영회장

흔해서, 오히려 너무 흔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 세대를 관통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영웅이 부재한 시대라는 말조차 이미 물린 말이 되어버린 이즈음,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여전히 굴러가는 것은, 대문만 나서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 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이 시대를 굴리고 가는 숨은 영웅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인터뷰였다. 

김 씨는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에서 태어났다. 65년 전 일이다.

그의 조부 대에서는 근검으로 부를 일구고 오탄리 일대의 많은 전답을 사들여 그 땅을 밟지 않고는 사람들이 오탄리 일대를 드나들 수 없을 정도의 지경을 소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대물림은 오래가지 않아 그의 부친 대에서는 빚보증으로 도산한 가계를 이끌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신북읍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고 한다. 가족은 월세 1천500원이던 단칸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1968년 남들보다 한 해를 더 했던 ‘7학년’ 초등학교의 졸업과 춘성중학교 입학이 동시에 있었던 해의 일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의 하루 노임이 100원 남짓이었다고 덧붙일 때 그의 눈가가 살짝 젖는 듯했다.

근근이 중학교를 마칠 무렵이 되자 고등학교 진학이 시련으로 다가왔다. 등록금이 면제되는 고등학교 특기생으로 진학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인천의 한 공업학교로 진학했지만 그나마 학교에 머문 것은 첫 학기가 전부였다. 더는 견딜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교복을 벗은 그는 서울의 공장과 시장 바닥을 전전하며 8년여를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렸어도 늘 힘에 부쳤다고 했다. 그는 끝내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의 삶 밑바닥에 두텁게 깔려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애정도 한몫했다.

1978년 귀향한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틈틈이 익히고 있던 차트 글씨를 밑천 삼아 연 간판 가게였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밑천이 가장 안 드는 일이 유리 가게를 하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짐차’라고 불리던 이웃의 짐자전거를 자신의 자전거와 맞바꾸어 유리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는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했으므로 그 자전거로 율문리, 천전리, 유포리, 발산리, 지내리, 용산리를 매일 한 바퀴 도는 일정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러면 하루가 저물었다. 

그의 성실함이 주변에 알려지면서부터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지인이 트럭을, 벌면서 갚기로 하고 넘겨준 덕에 더 그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고소(高所) 작업차 3대를 운영하는 업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의 소소한 성공기에 대해 김 씨는 모두 주변의 도움 덕이라고 말한다.

청년회와 함께 하는 집수리 봉사활동. 사진제공=김용기
청년회와 함께 하는 집수리 봉사활동. 사진제공=김용기

그는 삶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 지역에 작은 도움이라도 돌려주고 싶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자처해 지역 도우미 활동을 하는 일은 많다. 신북읍 의용 소방대원으로 또 자율 방범대 대장으로, 청년회를 이끌며 했던 독거노인이나 생활 취약자 집수리 봉사며, 춘천시 자율 방범대 초대 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각종 봉사 단체를 이끌어온 이력만이 아니다. 본인이 밝히기를 꺼리는 익명의 장학금 지원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현재는 본업의 바쁜 와중에도 신북읍 번영회장직을 맡아 특유의 성실함으로 빼어나게 분투 중이다. 

마적산 등산로 정비 및 개설, 굳게 자리매김한 용너미길 행사, 해마다 하는 마적산 해맞이 행사 외에도 그 밖의 지역 현안들로 그의 머릿속은 늘 부산하기만 하다.

“너무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내가 결혼을 좀 빨리하려고 했지. 그러던 차에 직장 동료였던 아내가 내 눈에 들어왔는데 어느 날 내가 편도선을 심하게 앓게 되었던 거야. 그때 아내가 병구완을 해주었고 그 일을 계기로 결혼에 이르게 된 거지. 어려운 살림에도 묵묵히 함께해 준 아내가 늘 고맙고 잘 자라 준 세 아이도 고맙고…, 이게 우리 가족의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준 이웃들의 고마운 마음 덕분이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 젊은 할아버지 눈가에 살짝 서렸던 물기를 몰래 훔치는 걸 못 본 체하다 물었다, 앞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를.

“뭐, 특별히 그런 건 없어요. 콕 짚자면 내 힘이 닿는 한 고마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일이고, 보탠다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마적산 지킴이를 놓지 않을 거예요.” 

그는 인터뷰 마지막까지 사사로운 자기 보상을 끝내 사양했다. 이 이야기는 춘천 사람들에 흔한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 건강하게 사는 춘천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이다. 당장은 조금 힘들어도 우리가 이 시대의 작은 영웅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이다. 

끝으로 김용기 씨와 그의 가족 그리고 춘천을 견고히 지탱하고 있는 이런 보통 사람들의 승리하는 삶에 행복이 늘 함께하길 빌었다.

  유기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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