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 (문화비평가)
이정배 (문화비평가)

공연장에서 만난 무용수를 인터뷰 하면서 그의 현재 소속에 관해 물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체육대학 무용학과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다른 무용수에게 소속을 물었더니 이번에는 자신은 예술대학 무용학과 소속이라고 소개한다. 잠시 헛갈렸다. 왜 어떤 무용학과는 체육대학에 속해 있는가 하면, 어떤 무용학과는 예술대학에 있는 것일까? 내친김에 존경하는 무용 스승에게 무용과 체육의 유사한 점과 차이점까지 곁들여 묻자 차분하게 답해주었다.

“신체를 훈련한다는 면에서 체육과 무용은 매우 닮아 보인다. 몸을 유연하게 단련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나 근육과 관절 그리고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고강도로 훈련한다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표현방식과 목적에 있어 체육과 무용은 다르다. 체육은 잘 훈련된 몸을 통해 인간의 능력과 그 한계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면, 무용은 그러한 몸을 통해 몸이 담고 있는 내면의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무용에서 움직임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움직임의 물리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키네시스(Kinesis)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임의 정서적인 면을 주목하는 메타키네시스(Metakinesis)가 있다. 몸의 테크닉을 중시하는 것은 키네시스 측면에서 무용을 감상하는 것이고, 몸 움직임의 의미를 중시하는 것은 메타키네시스 측면에서 무용을 바라보는 것이다. 체육이 주로 키네시스에 집중한다면, 무용은 메카키네시스에 보다 집중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용스승의 말을 가만히 되새겨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무용의 심리적 차원을 발견했다. 관객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근육감각을 상상을 통해 공감각적으로 느낀다. 근육감정과 관련된 감정을 과거 경험으로부터 연상 작용을 통해 떠올려 이해한다. 관객은 그 느낌을 기반으로 움직임의 의도를 추론한다. 그런 면에서 생활의 경험과 무용의 움직임을 동일시할 수 있다. 반대로 무용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에겐 뇌 속에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뇌가 받아들여 온 몸을 동일하게 자극하여 몸이 동작하도록 한다. 우리가 직접 행동해보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몸은 거울신경세포에 의해 상대의 움직임을 공감하여 동일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작동연습을 한다. 따라서 무용을 보면 우리 뇌 속에서 무용수의 동작과 동일한 자극이 온 몸에 전달되어 마치 내가 무용동작을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무용수의 내적 의미는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고, 그 동작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거울신경세포에 의해 몸이 자극을 받아 동일한 움직임을 경험하게 된다. 무조건 모든 움직임이 공감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미 경험한 것들이 자극을 받아 다시 일어나게 되고 이를 통해 무용수의 동작을 내가 온몸으로 느끼고 작동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은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는 독한 전염성을 지닌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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