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민연대’ 최은예 사무국장

춘천의 대표적 시민사회단체인 ‘춘천시민연대’가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 아니냐?’, ‘빨갱이 집단이냐?’ 온갖 낭설과 비난 속에 굳건히 스무 해를 맞이했다.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더 다양해진 시민사회의 요구를 아우르기에는 늘 부족함이 있지만 가는 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바위에 수없이 부서지던 계란이 어느 날 닭이 되어 날아오르리라는 그 희망의 이야기를 춘천시민연대의 첫 여성 사무국장에게 들어본다.

 

시민사회활동가의 시작은 언제부터, 어떤 계기였을까?

“2008년부터 시민사회 활동가를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육아에 전념했죠. 후평3동에 ‘뒤뚜르도서관’ 설립 준비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주부였던 제게 사회적 이슈는 멀고 낯설었지만 도서관 사업은 아이도 있어서 거부감도 적었죠. 자연스럽게 지역문제에 하나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사실 사명감을 갖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오래 할 줄도 몰랐어요. 그 세월이 11년차에 접어들었네요.”

내 지역 보다는 서울, 사람보다는 큰 이슈가 관심사였던 최 국장에게 활동가의 삶은 사람을 보게 했다. 활동가의 삶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최은예 사무국장
최은예 사무국장              사진 김애경 시민기자

“음…, 이타적인 삶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함께 공유하고 영위할 수 있는 삶을 생각해보게 된 거죠. 관심의 중심이 ‘나’에서 ‘너’ 그리고 지역으로 옮겨진 것 같아요. 역시 ‘함께 잘살자’가 가장 큰 목표고요.”

10년차 활동가의 경력이 내공을 키워주었겠지만 춘천시민연대 첫 여성사무국장이라는 가볍지 않은 타이틀, 어떤 생각과 각오가 있을까? 

“전임 사무국장이 워낙 대외적 업무에 집중했었기에 옆에서 지원을 잘 하자는 생각만 했어요. 갑자기 사무국장 자리가 공석이 됐을 때, 내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했죠.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당신 아니라도 된다. 그냥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머물면 단체에도 발전이 없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신념으로 일하라’는 조언이 크게 와 닿았고 결심을 했죠. 후임도 키워서 물려줘야 할 책임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매년 힘들고, 언제 그만둘까를 고민해요.”

열악한 시민사회단체의 환경개선이 목표였던 최 국장에게 첫 번째 목표는 단체의 재정적자 해소였다. 밀린 공과금, 기초생계보장도 안 되는 상근자 처우, 열악한 근무지환경…. 두 팔을 걷어붙여 빚 청산과 상근자 최저임금보장, 사무실 이전의 목표를 억척스럽게 달성했다. 1차 목표가 이뤄지고 이제 떠나도 되겠다 싶은 순간 다시 주어진 ‘국장’이라는 무게의 역할에 대해 최 국장은 담담히 말한다.

“전임 국장처럼 방송이나 대외적 활동을 잘 할 자신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죠. 저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시멘트가 굳기 전 서로를 단단하게 연결시켜주는 그런 역할, 시민사회단체나, 시민, 소모임 등의 활동들을 뒤에서 지원해주고 서로의 필요와 조건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려고 해요.” 

시민사회활동가 이후의 삶에 대해 그녀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까?

“일단 놀고 싶어요. 그리고 열심히 활동하는 춘천시민연대 회원이 되고 싶어요. 늘 듣는 비판중 하나가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소리인데 뼈아프게 새겨야 할 꾸짖음 같아요. 일부 집행부가 꾸려가는 단체가 아니라 회원들이 즐기고 열심히 참여하는, 시민의 어깨동무가 되도록 열심회원으로 참여할 거예요(웃음).”

일하는 주부들이 왜 그렇게 업무 외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이지만 역시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아쉬움은 남는다.  

“엄마로서는 감히 점수를 주지 못하겠어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도 시큰한 기억이 있어요. 작은아이 7살이 되던 해에 제가 시민사회활동가 일을 시작하고 다음해 그 아이가 입학을 했어요. 당시 시의회 의정모니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의회 내 휴대폰 소지가 금지되었었죠. 아이가 학교 마치고 엄마에게 전화를 20통을 넘게 했는데 엄마는 연락두절이었던 거죠. 당시에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갈등이 가장 컸었는데 그 고비를 넘고 지금에 이르렀네요.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해요. 제가 집에 있었다고 더 잘 컸을 것 같진 않아요.”

그런 최 국장에게 아이들 양육을 위한 절대적 원칙이 있었다며 사뭇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남편과 약속한 것이 있었어요. 아이를 키울 때 부모가 서로 다른 교육관을 갖지 말자. 엄마는 공부해라, 아빠는 놀아라. 따로 놀지 말자고 약속했고 잘 지킨 것 같아요. 우리 부부의 합의가 잘 이루어진 것 같아요. 주변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내 아이가 행복해하면 만족했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큰아이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땐 하루 한 끼를 먹어도 좋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대신 그런 나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 않고 살 거래요.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삶을 보고 배웠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삶을 인정해주고 놓아서 바라봐 준 것이 본인들의 행복추구, 그와 똑같은 무게의 배려를 알게 한 것 같아요.”

2015년 6월, 춘천시민연대 소모임 '행복한 시 읽기' 에 참여하고 있는 최 국장.      사진박백광 시민기자
2015년 6월, 춘천시민연대 소모임 '행복한 시 읽기' 에 참여하고 있는 최 국장. 사진 박백광 시민기자

인터뷰 중간 중간 ‘저와 같이 사는 사람’이란 표현으로 등장한 남편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 좋은 동료가 되어 준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배시시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우린 형제 같은 부부라고 말하고 싶네요. 21년차 부부인데,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제 일에 격려와 조언과 응원을 해주는 내 편이라 고맙고 힘이 되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늦은 귀가에도 제 일을 존중해주어서 저도 남편을 존중하죠. 부부는 상대적인 관계 같아요.”

춘천의 구석구석을 알게 되면서 최 국장이 느끼는 춘천은 어떨까?

“지역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모든 것이 인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거죠. 옳고 그름보다 앞서 고려되는 것이 내가 아는 ‘누구’가 하는 일인 것. 춘천은 어느 선 이상 내어주지 않는 경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역 색이 없는 듯싶지만 그 단계를 넘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반대로 그 지역성이 장점인건 그 덕에 적절한 선에서 새로운 사람도 그가 가진 재능을 쉽게 파악하고 그와 섞일 수 있더라고요.”

산업혁명시대의 속도만큼은 아닐지라도 개인의 목소리가 중요해진 요즘 그 다양성을 어떻게 안고 시민들 속으로 다가갈지 향후 활동 방향을 물었다.

“2016~17년 촛불집회에서 춘천시민들의 응집력을 보고 놀람과 동시에 반성했어요. 시민들이 안 움직인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요구를 헤아리지 못하고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했던 건 아닌가하는 반성이었죠. ‘춘천시민연대’가 싸움하는 단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꾸어 가자는 시민들의 모임이라는 걸 꾸준히 알려주려고요. 가장 큰 숙제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우리 단체가 지역의 이슈를 파이팅해 나갔다면 앞으로는 삶의 이슈를 만들어 가려고 해요.”

우리의 삶에 좌우가 없다고 모두 동의하지만 결국 이슈가 생기면 좌우를 가르는 우리의 자화상을 더듬어볼 일이다. 지역사회 안에서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 각자의 역할나누기 장을 마련해 줄 ‘춘천시민연대’와 함께 하며 그 중심에 든든히 10년차 경력을 풀어놓을 최 국장의 행보에 박수와 응원을 보탠다.

임희경 시민기자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