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광장은 누구나, 언제든 구호를 외칠 권리가 있는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지난 1월 19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링컨 기념관 계단에서는 여러 단체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토착 원주민(Native American) 오마하족 원로인 네이선 필립스(Nathan Phillips)도 서너 명의 오마하 부족 원주민들과 토착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며 원주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들 주위로 수십 명의 십 대들이 몰려왔는데 다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라고 쓰인 빨간 ‘트럼프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장벽을 건설하라”, “트럼프 재선 가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열린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했던 켄터키주 소재 코빙턴 가톨릭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원주민 전통 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필립스 바로 앞에 있던 닉 샌드먼(Nick Sandmann)이라는 학생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필립스를 쳐다봤다. 원주민 시위자인 필립스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짓이나 공격적인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지만 이민자를 싫어하는 이민자가 원주민을 모욕한 그의 삐뚤어진 태도만큼은 명백했다. 

미국 사회는 경악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원주민을 ‘이방인’ 취급하고 모욕적인 언행을 한 학생들에게서 노골적인 증오와 결례, 종족 협박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스가 눈물을 훔치며 “나는 학생들이 장벽을 세우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는 원주민들의 땅이다. 장벽을 세울 이유가 없다. 그 어린 학생들이 굶주린 이들을 돕는, 진정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데 힘 쏟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라고 항변할 때 고개를 떳떳하게 들 수 있는 미국인이 얼마나 될까? 

지난 11일 광주지법 법정에서 한 유명 인사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 맞은편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 창가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새싹답다는 상쾌함도 잠시, 자유연대 등 일부 극우단체들이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동산초등학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생들의 정치 구호 제창에 대해 학교 측에 사과를 요구했다는 소식이 꼬리를 물었다. 교사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사고라는 주장은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단식시위를 비웃던 ‘일베’들의 먹방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우리 앞에 두 사회가 있어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느 사회를 골라야 할까? 

가치중립적 태도를 강조하는 이가 어른인 사회와 ‘가만히 있으라’는 정치적 중립이 낯부끄럽지 않냐고 외치는 이가 아이들인 사회. 망가진 아이들을 선도하는 어른이 있는 사회와 망가진 어른을 훈계하는 아이들이 있는 사회. 어느 것을 골라야 할까? 정말 난형난제하다. 결국 우리는 이대로 야만의 들판에 버려지는 걸까?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