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시인)
금시아(시인)

사람이 태어나는 데는 10개월이라는 준비 기간이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청천벽력처럼 느닷없이, 빠르게 혹은 너무도 느리게, 하물며 자신이 선택하는 죽음까지 그 형태는 각양각색 천차만별이다. 죽음 앞에서 사회적 위계질서, 지위고하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니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삶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을 의식하고 현재 주어진 생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으라는 것이다. 위아래, 선후(先後)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죽음. 그렇기에 우리는 종잡을 수 없고 예의조차 없는 죽음을 죽음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별할 것인가? 죽음을 선고받은 이들에게 이별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강릉에 있는 갈바리의원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라는 수녀들이 세운 한국 최초이자 동양 최초의 호스피스병원이다. 

‘블루베일의 시간’은 그곳에서 100일 동안 죽음을 맞는 환자와 그를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한 TV 다큐멘터리다. ‘블루베일의 시간’은 죽음의 현장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나 받아들여야 하는 가족에게나 죽음은 힘든 시간일 수밖에 없다. 

이때 이곳 수녀들은 환자와 가족들이 두려움 없이 이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임종의 벗’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진정성 깃든, 헌신적인 수녀들의 봉사는 가히 숭고한 신앙이다. 서로 못다 한 사랑을 손편지에 꾹꾹 눌러쓴 ‘블루베일의 시간’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또 가족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죽음은 두렵고 무겁기만 할까? 어떤 죽음은 축제가 될 수도 있다. 시종일관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유쾌한 장례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지루한 이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펼친 그의 마지막 퍼포먼스 ‘넥타이 자르기’는 그를 사랑하는 남은 자들의 ‘경외’였다. 백남준은 자신의 몸에 수북이 쌓인 자른 넥타이를 매고 떠났다. 

남미에는 매년 10월 ‘죽은 자들의 날’이라는 축제가 있다.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른다는 고대 마야족의 전통이다. 죽은 영혼을 불러들이고자 무덤에 꽃과 선물을 장식하고 집 안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특별한 제단을 꾸며 사진과 선물을 올려놓는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이 문화는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Coco)’의 영감이 되었다. 

간암으로 투병하다 세상 떠난 이성규(야고보) 다큐멘터리영화 감독도 죽음의 과정을 축제처럼 즐기려 했다. 죽음을 통보받은 남은 3개월 동안 그는 춘천의 한적한 호스피스 병동으로 홀연히 떠났다. 그는 병상에서 투병기를 쓰며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기록했다.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는 독립영화예술 사랑에 남달랐던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자신의 인생이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했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을 묻자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라고 한다. 우리 속담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이 말들은 모두 죽음보다 이승의 삶이 더 절실함을 강조한다. 즉, 죽음이 있기까지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우는 말이다. 죽음은 언제든 우리를 끌어당길 것이다. 의료 종사자에게조차 ‘죽음 교육’이 있는 걸 보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짐작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처방전이 있다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아닐까?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가장 충실하라는 말이다. 매 순간 충실한 것이 내 마지막 순간에 다가올 후회를 가장 최소화하는 약일 것이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패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는 감히 자신을 수정할 수 있지 않은가. 

삶의 충실한 연습은 삶의 근육을 더욱 단단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연습한 삶의 결과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만들고 있는 조각품들. 이제 죽음은 죽음에게 맡겨두자. 이제 우리는 모두 ‘카르페 디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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