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여지영 회원

“잘 커줘서 고맙다. 우리 딸 장하네, 고맙다.”
“알았어. 바빠, 나중에 통화해.” 
어색하고 멋쩍어 서둘러 끊었다. 여지영(42) 씨는 이렇게 2019년 1월 1일 밤,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는 엄마와 초등학교 1학년 때 헤어졌다. 그리고 네 명의 어머니가 생겼다. 아버지는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서울에 새 살림을 꾸리셨다. 지영 씨와 남동생은 춘천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아버지의 재혼은 성년이 될 때까지 반복되었다. 쉽게 털어놓을 만한 가정사가 아닌데 그녀는 씩씩하고 당당했다.

 

“저는 관종이에요(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춤 연습을 하며 연예인의 꿈을 키웠어요. 저의 가정환경이 평범하지는 않아서 수군대거나 비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춤을 추며 친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저는 부자가 된 듯했어요. 아버지를 미워한 적도 많지만 아버지의 예능 유전자를 제가 고스란히 물려받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하지 않으면 용돈을 주지 않으셨던 아버지에게 배운 경제관념은 위대한 유산이에요.”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은 넘어지고 구르며 얻은 상처가 아물어서 단단해진 열매 같다는 느낌이었다. 

“중학교 시절엔 극성팬들의 러브레터 때문에 풍기문란 죄로 정학 처분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 당시 집에만 있었는데 우울하고 힘들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나는 대중의 인기가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란 걸…. 그래서 고등학생이 되어도 춤을 계속 추었죠. 거리에서 저를 알아봐주고 칭찬해주니 한껏 우쭐하기도 했어요. 밖에서는 행복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만나야 하는 새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와 학대는 고통이었죠. 그리고 연예기획사의 연락을 할머니가 전해주지 않아 꿈을 이룰 수 없었다는 좌절감은 반항이 되기도 하고 그럴수록 춤과 음악에 빠져 지내며 DJ로 활동했어요.”

여지영 씨                    사진= 여지영
여지영 씨                         사진= 여지영

 

남동생은 학비가 없어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녀는 고모에게 등록금을 받을 수 있어 운이 좋았다. 재학 중에도 틈틈이 아버지의 식당일을 도왔는데 새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중적 태도가 탄로 나자 전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 

그녀는 휴학을 하고 스물두 살에 아버지 식당에서 회칼을 들었다. 주방, 서빙, 식자재구입, 홍보, 회계 등 전 과정을 배워나갔다. 일은 더 많이 하고 월급은 덜 받았다. 직원들을 배려한 아버지의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 손님에게도 극진하게 대접하는 서비스 정신은 투철했다. 장사에 관한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많았다.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자 아버지는 지영 씨에게 영업직을 권했다. 카드영업도 1년 만에 인정을 받고 채무자들과 법정을 오가며 채권도 배웠다. 보험영업까지 하며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먼저 생각하고,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는 그녀의 장점이다.

“저는 한번 파고들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에요. 좋게 말하면 노력 형이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좌절하고 울고 웃는 모습을 봤어요.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어서게 된다고 믿어요. 그리고 현장에 답이 있어요. 지혜를 얻게 되죠. 저는 ‘옷깃인연’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저의 고객이든, 직원이든 한번 인연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지금 부동산 컨설팅하며 함께 시작했던 직원들도 가족처럼 제가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있어요.”

어쩌면 그녀는 살뜰한 가족이 절실했던 것은 아닐까?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가족이 늘 그리웠으리라. 그녀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터득했으리라. 이런 말에 당당한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그 말이 딱 맞아요. ‘나는 성공해야 해, 보여주겠어’를 되뇌었어요. 뒤에서 나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던 그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엄마를 찾고 싶었어요. 왜 우리 곁을 떠나야했는지 묻고 싶었어요.” 

그는 연예인 못지않은 재치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강의도 한다.      사진=여지영
그는 연예인 못지않은 재치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강의도 한다.      사진=여지영

그녀는 세련된 복수를 계획했다. 늘 그래왔듯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의 식당은 낙지요리를 개발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새어머니가 또 생겼다. 경제적 사정이 좋을 때도 남매에게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아버지의 사정이 나빠지자 새어머니는 지영 씨에게 손을 벌렸고 갚을 길이 없자 아버지의 식당을 넘겨줬다.

식당을 하며 바로 앞에 있는 호프집까지 인수해서 서너 시간 쪽잠을 자며 장사에 매달렸다. 그녀의 방식은 통했다. 새 메뉴를 개발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철저한 고객관리는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1년 만에 건물주가 되었지만 사기를 맞았고 낙지에서 카드뮴이 검출되었다는 뉴스로 직격탄을 맞았다. 365일 쉬지 않고 꾸려온 가게였다. 3개월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원망했던 아버지였지만 할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산다는 것이 내심 고마웠기 때문에 허망했다. 식당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영업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른 중반에 부동산 중개보조원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보조원에게는 무례했고 직장에서도 저의 방식을 비난했죠. 그때 무작정 찾아가 만남 분이 세종건설 홍영숙 대표였어요. 저의 멘토죠. 부동산 중개보다는 고객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고 원하는 부동산 포트폴리오를 설계하는 일에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고객이 되어준 분들이 한마디 던지는 칭찬과 격려가 회사를 설립하게 하는 힘이었죠. 그래서 저는 긍정의 힘을 믿어요.”

그녀의 세련된 복수는 시련을 긍정에너지로 바꾸어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인연을 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시작으로 모교와 강원대 등에 기부한 장학금만 1억원이 넘는다. 강원도 최연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나눔이 행복이란 걸 깨닫게 됐다. 장학금을 기부하며 어린학생들의 꿈이 자신의 꿈처럼 소중해졌다. 그녀의 성공스토리는 《놀아본 언니와 부동산 할래, 부자 될래?》라는 책에 담겼다. 학창시절 좀 놀아본 언니는 놀아본 적이 없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목표를 먼저 내뱉고 그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이서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즐기며 일한다. 

“저 같은 사람도 책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라며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요즘은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강의도 시작했다. 부동산의 기초부터 다져주는 내용이다. 방송으로 본 여 대표는 연예인 못지않은 재치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매력을 발산했다. 어린 시절 꿈의 무대에 오른 것처럼 느껴져 행복해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복수는 필요 없다.

서둘러 전화를 끊던 날, 다 쏟아낸 눈물 뒤에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랑해요.”

……

"엄마,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쓴 책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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