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주 시인

“나의 시 ‘말향고래’처럼 나만의 향유를 담아 세상의 곤고하고 힘든 곳에 옥합처럼 깨뜨려 향을 바르고 싶어요.” 

말향고래를 꿈꾸며 아버지의 도시 춘천으로 돌아온 정영주 시인.

 

눈길 닿는 곳마다 꽃이 피어나는 4월의 오후, 자식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자그마한 가게를 마련했다는 시인을 찾아 나섰다. 

아기자기한 소품과 시집들로 채워진 작은 옷방 ‘시인의 뜰’에서 그녀가 목련꽃처럼 곱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1952년생인 그는 1999년 마흔일곱, ‘어달리의 새벽’으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조금 늦은 나이에 시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정영주 시인.          사진=정영주
정영주 시인.       사진=정영주

“삶이 끌고 온 발바닥의 이력이 글쓰기였던 것 같아요. 연필 하나만 있으면 머릿속에 고인 언어들이 글이 되는 거라서 늘 시인이 되고 싶다고 노래를 했어요. 사는 일에 치여 늦게 등단했지만 결국 제 길인 거죠. 이미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길이었고요.” 

첫 시집 ‘아버지의 도시’에서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삶에 대한 격렬한 몸짓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아예 없거나 없었어야 했던 존재랄까? 몇 년에 한 번씩 나타나는 아버지는 가난보다 더 지독한 폭력과 광기를 던지고 유유히 사라지곤 했어요. 그 뒤엔 여지없이 어머니의 배가 부풀어 올랐고요. 그런 사내를 여기저기 수소문해 기어이 찾아내는 어머니의 생을 지켜보는 자식들의 삶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쩌자고 어머니는 그 사내를 찾아내는 걸까? 지금도 우리 남매는 그 질문에 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삶이 있었기에 내가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거라면 시인이라는 이름을 반납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웃는 일이 쉽지 않은 삶, 어렸을 때 이미 너무 늙어버린 삶…. 근원이 아득해지는 존재감에 대한 상실! 아버지는 온통 상실입니다. 어머니가 여전히 아픈 질문인 것처럼….”

일곱 살 유년기부터 스물네 살 결혼 전까지 춘천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사이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를, 아버지를 좇는 어머니를 따라 유랑하다시피 했다. ‘어달리’는 묵호에 있는 작은 포구. 그곳에서 오직 어머니의 삯바느질에만 의지해야 했던 식구들은 굶는 날이 더 많았다. 노상 배가 고팠던 어린 시인은 새벽이면 사내아이들 틈에 끼어 포구로 나가 생선을 훔치기도 했고 밤이면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석탄을 훔쳐 팔기도 했다. 바다는 어린 소녀에게는 먹이를 사냥하는 생존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남아 가정을 꾸리고 슬하에 세 형제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시인의 결혼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짧게 답했다. “달에서 지구를 보듯이 벗어날 수 없는 거리, 가까이 갈 수 없는 거리. 그것이 남편과 아내의 거리죠.” ‘달에서 지구를 보듯’은 그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이다. 

“그 시집은 온통 남편에 대한 시”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런 남편을 두고 홀로 춘천으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춘천은 상처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싸매야 할 곳도 이곳입니다. 어딜 돌더라도 결국 이곳으로 오고야 마는 내 발바닥을 봅니다. 교동 쪽에 터를 봐 뒀어요. 거기에 작은 집을 짓고, 바느질하고 염색도 하고 수도 놓으면서 공방처럼 운영하며 살고 싶어요. 시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도 하면서….” 작고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는 시인에게서 말향고래의 향기가 났다.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자그마한 가게를 마련했다.       사진=정영주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자그마한 가게를 마련했다.       사진=정영주

이제 곧 모란이 피는 오월, 그러나 아픈 오월. 시인은 그해 오월 광주에 있었다고 했다. 80년생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영화를 찍나보다 하면서 내다보던 금남로를 그는 이렇게 기억했다.

“군인들이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아비규환이었지요. 지나가는 학생 머리를 쳐서 넘어지고 그러는데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을 들어서 트럭 위로 휙휙 던져 싣더라고요. 그런데 둘째를 막 낳았던 때라 젖이 불어 있었죠. 이러다 내 새끼한테 젖도 못 물리고 죽는가 싶었는데 그때 묵호가 생각났어요. 살기 위해 전쟁처럼 처절하게 살았던 그 시절이.” 

그해 여름/ 석탄과 바다와 파도뿐인/ 묵호에서 광주까지 시집온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붉은 꽃들이었다
- ‘오월의 신부’ 첫 연.  

그 혀로 피 흘린 오월의 옷을 지을 수 없다면/ 머리를 반쯤 숙이고/ 침묵을 절반쯤 잘라서/ 금남로 가장 번잡한 곳에 닥수군한/ 심부름꾼으로 세워두어야 한다고// 금남로 한쪽 길가에 앉아서/ 제법 사나워진 오월 햇빛을/ 정면으로 보다가/ 그 햇빛이 말씀인 것을 보았다 
- ‘햇빛 가시’ 중에서. 

“인간의 속성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 그 현장 중심에 서 있었던 나는 악마를 보았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그 속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며 민족이 민족을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구나, 경악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한없이 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찔림을 당하고 총에 쓰러지는 일….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개인의 권력과 탐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잔인한 것일지도 모를 봄날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험하고 거친 삶의 질곡을 지나왔음에도 너무나 해맑은 미소를 짓는 시인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지 물었다.

“시는 땀이고 눈물이고 피입니다. 삶은 누드여서 어떻게 에돌아도 다 들키기 마련입니다. 내가 모르는 시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삶의 비의감이 진정성이라면 다 들킬 작정입니다. 개인의 역사든, 시대를 품은 메시지든, 내 땀과 내 눈물과 내 피를 찍어 쓸 것입니다.”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 이제는 휴식과 같은 삶을 누리고 싶다는 시인은 산토리니와 같은 환하고 밝은 곳으로 떠나 그림처럼 예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늙었지만 써주기만 한다면) 평온하고 느긋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시가 봄날의 햇살처럼 투명하고 찬란하기를 소망하면서 목련꽃 그늘 깊어진 시인의 뜰을 빠져 나왔다.

이경애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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