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노조 강원전기원지부 엄인수 지부장

참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곳, 술 취한 아버지들이 껴안고 울며 대화를 하던 곳, 밤에는 어두운 골목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가로등이 매달려 있는 곳. 전봇대(전신주)가 나이든 세대에게 연결되는 낭만적인 이미지들이다. 이런 낭만적인 전신주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근로자들이 있다. 엄인수(48) 씨는 20여 년간 2만2천V의 고압을 만지며 한전(한국전력공사) 협력업체에서 정전복구 작업이나 배전공사를 해왔다. 목숨을 걸고 일할 수밖에 없는 그의 직업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지난 3월 4일 발생한 고성산불의 원인은 전신주에서 발생된 아크불티로 밝혀졌다. 전기적 방전으로 전선에 불꽃이나 스파크가 발생하는 현상인데 강풍에 전선이 끊어지며 강한불티가 발생해 마른낙엽에 붙어 큰불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전신주 고압선에서는 스파크가 튀며 큰 불덩이가 발생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심각한 산업재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매일 출근하는 일터에 고압이 흐르고 불꽃이 발생하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아무나 못할 일이다 싶기도 하다.

엄인수 지부장
엄인수 지부장               사진이철훈 시민기자

엄 씨는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 작은 시골마을에서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나무타고 개울에서 가재 잡으며 순박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을 헤아려 춘천기계공고 전기과로 진학해 졸업했다. 배전전기공은 군대를 다녀온 뒤 다른 직업보다 임금이 높다는 매력에 끌려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전봇대에 오를 때에는 선배로서 일을 가르쳐주는 ‘사수’에게 혹독하게 배웠어요. 줄을 걸고 올라가면 갑자기 발을 툭 차서 떨어뜨려 균형을 잡도록 훈련을 시켰죠. 위로 올라가면 어지럽고 아찔하고 고압선을 만질 때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기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전기를 살린 무정전 상태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요즘 실태에서 사고발생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절연차량(전기가 흐르지 않게 장치된 차량)에 달린 절연바켓(전력복구용 사다리차)을 타고 전신주 꼭대기로 올라간다. 절연복, 절연고무토시와 장갑 그리고 보호안경까지 착용하면 한여름 날에는 단 몇 분만 일해도 땀이 흥건해진다. 전기가 흐르고 있는 활선상태의 전선을 연결하는 일은 아찔할 수밖에 없다. 실수로 두 선을 동시에 만지게 되면 불이 ‘펑’ 하고 나게 되고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땀이 흐르고 식기를 몇 번 반복하면 등에는 등고선처럼 소금띠가 만들어지고 온몸에 땀 냄새가 밴다. 그 복장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이 함께 탈 땐 기다렸다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곤 했다. 샤워라도 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무의미한 소망을 혼잣말처럼 속삭여본 적도 여러 번이다.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의 위험을 알고난 이후로는 늘 마음 졸이며 살았다. 일하다 혹여 다칠까봐 흔한 잔소리도 못하고 남편이 일하는 현장을 올려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주5일 근무였지만 예전에는 밤낮도 없고 휴일도 없었다. 휴일근무수당도 주말수당도 없던 시절이었다. 한밤중까지 정전복구 작업이 이어질 때가 많아 늘 아내에게 미안했다. 1남1녀 를 둔 부부는 성실히 일하며 가정을 꾸려왔고 어느덧 아이들은 멋진 대학생이 되었다.

땡볕에 고압선을 다루는 전기배전공의 등에는 등고선처럼 소금띠가 만들어지고 온몸에 땀 냄새가 밴다.  사진=엄인수
땡볕에 고압선을 다루는 전기배전공의 등에는 등고선처럼 소금띠가 만들어지고 온몸에 땀 냄새가 밴다.        사진=엄인수

비상 출동해 일한 대가로 전기 공급이 되어 온 동네가 다시 환하게 밝혀질 때 직업의 보람을 크게 느꼈다. 그는 “솔직히 20대에는 그 일을 하며 전봇대에 올라가는 일이 창피 했어요. 말끔하게 차려입은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를 만나면 숨기도 했어요”라고 말하며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땡볕 아래에서 힘들게 일한 흔적을 보여주듯 눈가에는 잔주름이 선하게 피어있었다.

배전전기공은 한전 협력업체 소속이다 보니 2년마다 협력업체가 한전(한국전력공사)과 계약이 되지 않으면 직업 또한 유지되지 못했다. 언제 일을 그만둘지 몰라 늘 불안했다. 임금이 높은 장점도 과거 한때뿐 지금은 다른 직업과 임금차이도 크지 않아 젊은 근로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2년마다 협력업체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퇴직금 등 보장되는 것이 없었다. 위험직종 치고는 복리후생이 너무 안 되어있어 자연스레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분회를 만들어 2007년에 분회장을 맡아 강원도 최초로 협력회사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이뤘다. 단체협약은 공휴일 휴무 등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어려움에 처한 동료들을 돕기 시작했다. 4년 전부터 건설노조 강원전기원지부 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장 직무대행도 맡고 있다.

호주연수 시 대형화된 업체에 안정된 고용으로 여성근로자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은 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반면 호주는 6개월 정도의 연수와 교육을 통해 충분히 경험하고 실습해 본 후에 일을 하게 되어 처음부터 위험요소들을 많이 제거한다고 한다. 한국도 그런 인식의 변화와 고용안정을 보장한다면 얼마든지 젊은 층의 인력을 유입할 수 있고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처음 노조를 시작했을 때만해도 회사가 망해 없어질 거란 우려로 동료들과 친구들이 등을 돌린 적도 있었으나 2-3년이 지나도 몸담고 있는 회사가 건재하자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동료의 90%가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활선화된 작업현장에서의 적절한 시간배정과 무정전이 아닌 휴전상태에서의 작업 등 중대 사고를 방지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 계속 활동할 노동자들이다. 

정전이 되면 시민들의 불을 밝혀주었던 엄 지부장, 지금은 어렵게 일하는 동료들의 안전을 밝혀주고 있다. 그는 노조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후배들과 동료들에게 좋은 근무환경을 만들어 주기위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전기가 끊기면 사람들이 갑갑함을 느끼는 시대다. 일상생활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고 여름에는 폭염에 노출된다.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노동절로 시작하는 5월. 극한 노동조건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현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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