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소설가)
하창수(소설가)

말의 왜곡이 심한 사회, 그 왜곡이 일상처럼 쓰이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인들 그렇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런 통시적 판단조차 ‘지금-이곳’에서 벌어지는 말의 왜곡을, 그 끔찍함을 보상하진 못한다. 소설가가 아닌 사람들이 함부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을 소설이라 함부로 지껄이고, 그 지껄임을 다시 소설이라 말하며 함부로 소설을 쓰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고, 그 고함들을 고스란히 혹은 적당히 살을 보태 옮겨 적은 기사들이 소설의 정체를 바꿔놓는 이 끔찍한 시공에서 소설을 30년쯤 쓰며 살아온 소설가가 느껴야 할 자괴와 회한은 어떨까? 마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확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집행만을 기다리는 무고한 사형수의 그것과 유사하다.

소설가가 쓴 소설을 한번이라도 정성스럽게 읽은 자라면 소설이 아닌 것에 함부로 소설이란 말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가 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지평을 형성하고 그 지평의 확장을 경험한 자라면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을 호도하기 위해 거짓을 지어내지도 않겠으나 설사 지어냈다고 해도 거기에 함부로 소설이란 이름을 붙이진 않을 것이다.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기 위해 한번만이라도 밤을 새우고 그렇게 새운 밤의 시간들이 자신의 가슴에 별처럼 박히는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뿌듯함을 가져본 자라면 비틀린 수사와 지저분한 형용으로 얼룩진 언사를 감히 소설이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소설은 거짓말이 아니고, 거짓말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수학만큼이나 단순하고 명료한 이 논리가 설 곳이 ‘지금-이곳’에는 없다. ‘지금-이곳’은 비겁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비겁한 언어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자들로 넘치고, 치졸하게 조작된 언설을 지껄이면서도 치졸과 조작 대신 소설이란 단어를 상대의 등에 비수처럼 꽂는 자들이 범람하는, 언어의 소돔, 소설의 고모라다. ‘지금-이곳’에서 소설은 더 이상 소설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의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던 시대에도 말의 순정을 좇아 자신의 삶을 소설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첨단의 문명들이 초단위로 명멸하는 우주의 시대에도 엄밀한 문장의 힘을 믿으며 소설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그러나 ‘지금-이곳’을 압도하는 소설은 그런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 겪는 아픔과 비극이 이 시공만의 일은 아니지만, 이 시공에 존재하는 소설의 아픔과 비극은 지금 이곳의 일이므로 절절하다.

괴테,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고골, 플로베르, 발자크, 카뮈, 김유정, 장용학, 이청준, 최인훈, 조이스, 포크너, 스타인벡, 다자이 오사무, 루쉰… 인간과 삶의 가치를 숭고한 언어로 깎고 다듬어 조심스럽게 내놓았던 이들의 문장과 하수구의 악취를 풍기는 독설과 포악, 추악과 이기로 무장한 더러운 언사를 어찌 같은 이름으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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