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미국생활 끝내고 돌아온 김태영(66) 씨

그녀의 집 거실은 공방 같았다. 작업대로 쓰는 책상이 거실 한 가운데 놓여 있었고, 뜨개질로 만든 인형들과 실들로 가득했다. “제가 굉장히 활동적인 사람인데 아파서 거동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힘들었던 시기에 뜨개질하며 극복했어요.”

김태영 씨
김태영 씨

직접 내린 커피와 쑥과 쑥가루를 넣고 만든 전을 내어주며 건네는 목소리는 활기차고 표정도 밝아서 오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듯 스스럼없이 편안했다.

그는 다른 호칭이 불편하다며 자신을 모니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모니카는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서대문에 있는 노라노 양재학원에서 재단, 미싱, 디자인을 공부했다. 20대 초반에 의상실을 오픈할 정도로 배짱이 좋았다. 2년간 운영하며 돈도 제법 벌었다. 휴일이면 등산과 여행을 즐겼고 등산을 다니다가 남편을 만나 스물셋에 결혼을 했다.  

“실은, 결혼생각이 없었어요. 의상실을 운영하며 6개월 일어공부를 하며 일본에 있는 문화 복장학원 입학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제가 결혼을 했더라고요. 아이를 출산하고는 일본행은 어려워졌죠. 그래도 참 즐겁게 지냈어요. 여행도 많이 다녔고 텐트가 세 개나 될 정도로 캠핑 매니아였죠. 1970년대에는 산악회나 동호회가 거의 없었고 더구나 그런 여자는 더욱 드물었어요. 의상실을 하니 제 옷은 제가 만들어 입는데 좀 튀었죠. 나름 패션리더였어요. 웨딩드레스도 제가 만들어 입었고, 인조가죽으로 비키니수영복을 만들어 입고 예쁘다며 남편이 찍어준 사진도 있어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사진을 쑥스럽지만 자신 있게 보여주었다. 20대 후반의 모니카는 배우 같았다. 행복했고, 걱정이 없던 날들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암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직장생활을 계속하기가 어려워 남편은 퇴직했다. 생계를 위해 로드매장에서 옷을 팔기도 하고 재단사로 일하기도 했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남편은 인정도 많고 귀가 얇았다. 그도 모르는 남편의 빚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남편은 이민을 생각했다. 가정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전세로 준 집의 보증금을 정착금으로 쓰려했으나 그것마저 빚을 갚아야 했다. 일식집을 운영하는 남편 친구의 권유로 남편은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해 먼저 미국으로 갔다. 미국행이 싫었던 모니카는 미국의 패션스쿨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남편의 말에 6살, 8살의 두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뒤따라갔다. 

남편은 LA한인타운에 있는 친구네 식당에 취직을 했으나 그는 재단사였지만 영어를 못해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싱공장에 취직해 단순노동을 했다. 미국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노동시간만큼 지급되는 임금에 욕심이 나서 과로로 병이 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소통이 되자 재단사로 취직을 했고 17년을 일했다. 2000년 당시 월급여가 6천600달러 정도 되었다. 

“남편보다 제가 임금이 더 많았죠. 참, 일 많이 했어요. 자궁적출 수술 후, 하혈하면서도 일을 했어요. 과로하는 날이 많으니 건강을 해칠 수밖에요. 처음에는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시력에 문제가 있어 컬러를 구별하지 못해 오더를 잘못 내리게 되었죠.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되고나니 더 이상은 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나쁜 일은 항상 겹쳐서 오는가 봐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간병하고 장례식까지 치르고 미국에 왔는데 이번엔 제 관절에 문제가 생겼어요. 수술을 받았지만 1년 동안 거의 거동을 못했어요.”

어찌 40년 세월을 다 말할 수 있겠냐마는 서류상 문제가 생겨 15년 동안이나 영주권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체류자의 신분은 늘 불안하기만 했다. 아이들은 친정어머니가 1년, 큰집에서 4년을 돌봐주었다. 5년 만에 아이들을 품에 안았지만 여전히 영주권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 금전손해도 많았고 아이들 학비도 많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감사했죠.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술이나 마약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해서 범죄로도 이어지기 때문에 집에서 잘 보살펴야 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잘 적응하도록 하려고 집에 이웃들을 불러 파티를 하거나 이웃집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며 같이 놀게 했어요. 다행히 아들은 치과의사가 되어 개업하고 딸은 디자인을 공부했어요. 모두가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아이들만 조기유학을 보내거나 기러기 아빠가 되어 가족이 흩어지는 일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거의 걷지를 못했다. 무릎관절문제가 재발하고 허리도 아팠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공황장애와 우울증도 찾아왔다. 본디 쾌활하고 활동적인 사람인데 거동을 하지 못하니 끔찍했다. 주변에 사는 친인척들의 노년기 삶과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미국은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이긴 해도 노인 의료보장제도 중 저소득층이 혜택을 볼 수 있는 메디케이드(Medicaid)가 아니면 메디케어(Medicare) 보험으로는 의료비 지출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김태영 씨가 대바늘뜨기로 만든 인형
김태영 씨가 대바늘뜨기로 만든 인형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것보다는 영어가 서툴러서 의학용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제 몸 상태도 제대로 설명이 잘 안 되는 어려움이 크고, 병원에 입원하면 입에 맞지 않은 음식도 힘들어요. 한인타운 내 병원이나 노인전문병원도 있지만 아픈 사람은 늘 많아서 치료받기가 쉽지 않아요. 몸이 아프니 고국이 그립더군요. 고국에 오니 정말 좋아요. 미국은 차 없으면 집에만 있어야 해요. 하지만 한국은 집 가까운 곳에 편의시설이 다 있고, 대중교통이 좋아서 어디든 가는 데 불편함이 없어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나이가 들수록 불행하다고 여기며, 73.9%의 노인이 독립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정서적 고립은 우울증을 심화시키고, 노인의 우울증은 몸으로 반응하는데 그는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 성격이라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안 좋았던 과거는 되도록 빨리 잊고, 하고픈 일은 과감하게 행동한다. 거동하지 못하던 몇 년 동안 뜨개질을 하고 기도를 하며 극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대바늘뜨기 인형은 강의를 할 정도의 수준은 된다고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현명한 노년이다. 소소한 꿈을 꾸며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는 고국에서의 은퇴생활이 행복하길 바란다.

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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