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아(시인)
금시아(시인)

구순도 훌쩍 넘기신 엄마는 한 시절의 그때로 자주 되돌아간다. 그곳에는 마을이, 할머니가, 고모들이, 어린 언니 오빠들이 버둥거리고 있는 시간들이 있다. 그 속에서 엄마는 기다란 논 끝부터 어둑해져 오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더듬거린다. 나는 그곳이 칠 남매가 북적거리던 나의 유년임을 알고 있다. 엄마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고 물끄러미 바라146본다. 그리고 지금 기억하는 한의 시간 이전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소급한 엄마의 유년을 상상해본다. 만약 엄마를 각색한 유년을 TV 드라마처럼 선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기억하는 한의 시간은 늘 그랬다.’ 오정희 소설 《유년의 뜰》의 시작이다. 얼마 전 나는 오정희의 소설 《유년의 뜰》과 원작을 각색한 TV문학관 〈유년의 뜰〉을 각각 감상하였다.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는 감성의 식감부터 서로 달랐다. 그렇다면 각색은 원작의 어디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유년의 뜰〉 드라마는 시작부터 원작과는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후의 황폐한 삶을 배경으로 한 《유년의 뜰》은 어린 소녀인 ‘나’의 관점으로 펼쳐진다. 전쟁으로 인한 방황과 한과 절망은 소녀와 어머니, 할머니를 쭉 꿰고 흐른다. 소설과 드라마는 노랑눈이와 짜구로 불리는 ‘나’의 이름만큼 차이가 나고 있었다. 소설의 상상력은 시공간을 훌쩍 넘나든다. 원작의 묘사와 사건은 슬픈 시간을 아름답게 또는 공평하게 분배하고 있다. 그에 반해 드라마는 전달력이 강하다. 각색은 어린 ‘나’의 시선을 한쪽으로 몰고 간다. 드라마는 친절하지만, 자극적이거나 왜곡되어 도리어 어긋난다. 원작을 뭉텅뭉텅 축소하였고 배경도 겨울로만 한정되었다. 그렇다면 드라마 〈유년의 뜰〉은 원작의 문학성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각색자의 또 다른 의도를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각색이란 서사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희곡이나 시나리오로 고쳐 쓰는 것이다. 각색은 흥미나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하여 특정 부분만 더 강조하거나 실제로 없었던 것을 보태어 사실인 것처럼 꾸며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원작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대로 옮기는 과정에는 무리가 따른다. 어쨌든 각색의 이점은 원작의 주요 소재와 주제들을 각색자와 연출자의 성격에 따라 독특하게 살려내는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된 작품은 원작이 아닌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 재탄생 된다.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어떻게 각색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각색은 원작보다 더 훌륭할 수도 있고 어떤 각색은 원작보다 훨씬 더 실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좋은 영화와 TV 드라마를 위해 훌륭한 원작을 선택하고 해체하고 재창조하는 작업이 각색이다. 그렇다면 각색은 원작의 독특한 소재와 주제를 영상으로 어떻게 잘 살리느냐가 관건이겠다.  

엄마의 유년 시절이 엄마 자신에게 소급되지 않고 자식들의 유년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한다. 나는 엄마가 잠시, 자식들에게 온전한 잔소리를 할 때가 오히려 낯선 현실 같다. 엄마의 시간은 어떻게도 각색할 수 없는 기억으로 돌아가 더 자주 문을 닫아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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