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1,738,980. 월급날 통장에 찍힌 백만 단위 숫자는 물질적 부가 1백만 화폐단위 이상의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백만장자(millionaire)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는 나라의 화폐로 월급을 받았다면 1,400(미국 달러) 혹은 1,300(유로) 언저리의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네 자리든 일곱 자리든 똑같은 가치를 지녔다면 개인적으론 작은 단위가 좋다. 영을 세 개 뗀 짧은 숫자는 마치 혹을 뗀 것처럼, 거품을 걷어낸 것처럼 편하고 실용적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카페의 메뉴판에 적힌 3,500보다 3.5가 더 세련돼 보이기 시작했다. 3,500은 ‘원’으로, 3.5는 ‘콜라’로 읽었다. 편의상 이름 붙인 나 혼자만의 단위 Kollar(Korean dollar)다. 1콜라는 100켄트(Kent, Korean cent)다. 시나브로 ‘원’을 버리고 ‘콜라’로 갈아탄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혹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액면가 혹은 액면가를 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경제용어로 쓰일 때는 단위를 갈아엎거나 0의 개수를 잘라낼 때 쓴다. 이미 시중에 풀려 사용되고 있는 화폐를 다시(re-) 설정하는 것이어서 한국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단순히 화폐단위만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 자체가 올라가거나 떨어지지는 않는다. 정부가 1953년 100원을 1환으로 바꾸고, 1962년 10환을 다시 1원으로 변경했듯이 이 시대의 감각적 아나키스트들은 1,000원을 1콜라로 개혁해 쓰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자발적 화폐개혁 찬성론자들의 목소리가 꿈처럼 들리지 않는다. 2018년 국내총생산(GDP) 1천782조2천689억원은 2차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던 1962년(3천658억원)보다 4천8백배 이상 증가한 규모다. 한국은행이 밝힌 2018년 대한민국의 총금융자산 1경7천148조원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 단위인 ‘경(京)’이 나타난다. 한국의 수출 규모는 세계 6위(2017년 기준)에 이를 정도로 커졌는데 1달러당 1,100원대의 환율은 그 위상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OECD 국가 중 1달러 환율이 천 단위를 넘어가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리디노미네이션 반대 측은 액면 변경이 주로 경제위기를 겪는 후진국에서 단행되고 변경할 경우 자칫 사회적 갈등이 일고 국가 경제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라며 반대한다. 짐바브웨는 이런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낸 사례다. 2006년 8월 화폐단위를 1000분의 1로 낮췄지만 2008년 물가상승률이 무려 5천억%에 달하는 등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해 8월 화폐단위를 100억 분의 1로 다시 낮췄지만 효과가 없었고 2009년 2월 또 한 번 1조 분의 1로 떨어뜨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결국 2014년 짐바브웨는 미국 달러를 통화로 받아들이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터키는 그 반대다. 2005년 1월 화폐단위를 100만 ‘리라’를 1‘신리라’로 변경했다. 덕분에 2001년 68.5%까지 치솟았던 터키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05년 8.2%로 내려가며 안착에 성공했다. 

월급으로 1,700조를 받고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에 1,000,000,000,000권 지폐를 내는 것보다는 1,700콜라를 월급으로 받고 1콜라 동전 하나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싶다. 

대비는 하되 두려움에는 휩싸이지 말자. “두려움은 희망을 동반하고 희망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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