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기원전 390년 북쪽에서 밀려 내려온 갈리아족이 로마를 점령했다. 하지만 양쪽의 사정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자연히 휴전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로마의 대표자 술피키우스와 갈리아의 왕 브렌누스가 서로 만나 의논한 결과, 로마가 황금 1천 파운드를 지불하면 갈리아 군이 로마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로마인들이 황금을 가지고 나와 양팔 저울에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리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은밀히,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저울대를 마음대로 흔들었다. 화가 난 로마인들은 양팔 저울에 쓰는 저울의 무게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불평했다. 브렌누스는 비웃음과 함께 칼을 뽑더니 칼과 허리띠를 비롯한 온갖 물건들을 저울 위로 던졌다. 로마의 대표자 술피키우스가 물었다. “대체 뭘 하자는 짓입니까?” 브렌누스가 대답했다. “뭘 하자는 짓이겠소? Vae victis(패한 자는 비참하다)!” 

Vae victis behavior. 승자가 정당하다고 믿는 태도를 말한다. 지금 중국 기업 화웨이를 통해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태도가 그렇다. 미국의 전방위 제재에도 불구하고 독자생존을 자신했던 화웨이는 노트북 신제품 출시를 포기하며 두 손을 들었다. 5세대(5G) 네트워크에 화웨이 통신장비를 쓸 경우 현재 한미 양국 간에 공유되고 있는 민감한 군사 정보와 안보 정보를 노출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태도 역시 대한민국을 겨눈 ‘브렌누스의 칼’이다. 하이코마스 독일 외무장관이 “독일 보안기준을 준수하는 한 특정 회사를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퇴짜를 놓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없다면 칼의 방향을 돌려놓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약자가 꿈꿀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런 와중에 740만 홍콩 시민들이 보여준 ‘피플 파워’는 그나마 작은 위안이다. 5명 중 1명 이상인 144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번안해 부르며 저항하는 민심 앞에 브렌누스도 더 이상은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1997년 7월 1일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넘겨받은 중국은 ‘한 나라 두 체제(一國兩制)’와 2047년까지 50년간 ‘고도의 자치’를 보장했다. 그러나 2012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2015년 10월과 12월 석 달 사이에 퉁뤄완 서점의 점장 등 모두 5명의 홍콩인이 실종됐다. 퉁뤄완은 중국 대륙에서 출판할 수 없거나 판매할 수 없는 ‘금서(禁書)’를 팔아 재미를 보던 서점 중 하나였다. 세 명은 중국에서, 한 명은 태국에서, 마지막 한 명은 홍콩에서 사라졌다. 홍콩인을 경악시킨 건 홍콩에서 실종된 경우였다. 중국에 가는 것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고도의 자치를 허용받는 홍콩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6년 6월 홍콩으로 돌아온 린룽지가 실종 사건 3년 만에 용기를 냈다. “만일 우리가 소리를 내지 못하면 홍콩은 구원받을 수 없다. 이번 일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홍콩인의 인권과 자유와 관련된 일이며 퉁뤄완 서점 직원 실종 사건은 중국이 ‘일국양제’를 위반한 것이다.”

결국 중국이 칼을 내려놓았다. 케리 람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범죄인 인도법’ 추진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국가와 국가의 충돌은 국력을 시험하고, 국가와 국민의 충돌은 폭력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의 연대 의식을 시험한다. 약자끼리의 연대가 없다면 목에 겨눠진 칼을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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