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안경술 (발도르프 교육활동가)

낮이 일찍 시작된다. 밖이 훤해 눈을 떴는데 아직 5시 조금 넘은 시각이다. 미세먼지가 주춤한 요즘, 창을 열면 무성해진 나무를 배경으로 시원한 공기가 절로 기분을 맑게 한다. 근래 새로 생긴 습관이다.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 창을 열고 짧은 키의 상체를 밖으로 뻗어 아침 공기로 샤워를 한다. 오늘 아침에도 공기를 즐기다가 에어컨실외기에 연결된 배관이 눈에 들어왔다. 8년 전 이사 왔을 때 설치했을 실외기 배관을 감싼 비닐테이프의 윗부분이 사라지고 아래쪽만 남아있다. 아마도 직사광선과 바람에 삭아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 가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환경을 지키겠다고 무상비닐봉투제공이 금지되기 전부터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가방, 차 안에 늘 준비하고 다녔고, 외출할 때는 텀블러를 챙겼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만큼은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고 모임에도 늘 도자기 컵을 준비했다. 그러니 요즘 논란이 되는 미세플라스틱 난리가 “적어도 내 탓은 아니지”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나도 모르는 또 어떤 것들로 미세 플라스틱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는데도.

아이들이 생활할 곳을 찾아 새롭게 공간을 만들며 플라스틱과 알록달록 장식된 모든 것들을 내보냈다. 비닐시트지로 마감된 책상과 가구, 교구장들도 내보냈다. 1톤 분량의 쓰레기가 나갔다. 시트지가 들떠 날카롭게 된 부분은 아이들의 연한 피부에 상처를 내기 쉽고 세월 따라 벗겨져 나올 플라스틱 블럭이며 놀잇감의 미세한 가루들이 아이들의 피부와 입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깝지가 않았다. 

아이들을 맞을 교실과 놀이공간이 텅 비었다. 책상은 참나무와 물푸레나무로 새로 짰지만 그 외 모든 것들은 중고로 마련했다. 어린이집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 우리와 같은 교육철학으로 오랜 세월 아이들을 길러낸 서울 지역의 소규모 발도르프 어린이집들도 어려움을 겪다 문을 닫고 정리하는 곳이 생기고 있다. 교사들과 부모님들의 정성,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그 가구, 놀잇감들을 실어왔다. 

오염된 곳은 사포로 문질러 벗겨내고 다시 기름을 바른다. 기름은 해충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고, 질감을 매끄럽게 한다. 오래 사용해 홈이 패거나 크레파스가 묻은 부분도 사포질로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10년을 사용했어도 매주 빨아서 사용했을 놀이용 천들은 여전히 깨끗하다. 몸통 속의 솜이 뭉친 동물들, 인형들의 창구멍을 열어 뭉친 솜을 꺼내고 새 솜을 넣으니 포근한 느낌이 살아나며 새것이 되었다. 동물인형들의 몸속에서 꺼낸 뭉쳐진 양모솜은 다시 깔개쿠션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소꿉놀이용 나무그릇들은 세월이 지난 만큼 매끄럽고, 아이들 손길 닿아 만들어진 사용감이 더 곱다. 자연목 나무토막들은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맨들맨들 질감이 고와 조각가의 작품보다 아름다워졌다. 아이들의 공간이 아름다운 놀잇감으로 채워졌다. 소재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놀잇감용 천이나 인형은 아이들에게 주기 전 귀퉁이를 불에 태워보곤 한다.

나무, 면, 마, 모, 견 등 천연소재로 된 것들은 불에 태우면 모두 부스러져 흙에 섞어도 좋을 재를 남긴다. 그러나 아무리 실크처럼 그 질감과 색을 흉내 낸 것이라도 합성섬유가 섞인 것을 태우면 검고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가 남는다. 흙에 섞었다가는 뿌리 한 가닥도 살릴 수 없는 훼방꾼이 될 것이다. 플라스틱으로 된 놀잇감도 마찬가지이다. 블록이든 소꿉놀이든 그 이름에 상관없이 낡아지며 미세 플라스틱 가루를 만들 것이고 버려지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 쓰레기가 되어 땅을 오염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겠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미세플라스틱은 쉽게 우리 몸으로 들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가늠할 수 없어 더 두렵다. 

에어컨 배관을 감쌌던 비닐테이프의 일부가 이미 나와 아이들의 몸속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번 배관공사 때는 보기에 덜 깔끔해도 좋으니 비닐 테잎을 감지 않는 마감방법이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모두가 노력하면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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