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편집위원
이충호 편집위원

기원전 600년 무렵 아테네는 농민계급의 몰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빚을 진 농민들은 채권자에게 토지를 저당 잡히고 연간 20%에 가까운 이자를 물어야 했다. 몸을 저당 잡혀 얻은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는 노예로 귀속되었다. 대다수의 자유농민이 사라지자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도시국가는 위기를 맞았다. 

구원투수로 솔론(Solon)이 등장했다. 그는 인신 저당으로 노예가 된 시민에게 자유를 선언했고 빚 때문에 토지를 빼앗긴 경우 빚을 탕감하여 이전 상태로 환원시켜 주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빚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는 건 불행이라고, 가난한 자들이 자유를 행사해야 할 자리에서 부자들의 뜻을 따라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믿었다. 

법정이나 나라의 관료, 공공의회 등은 부자들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던 솔론은 고의로 법조문을 애매하게 만들어 실제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했다. 배심원들의 권한을 더 크게 하려는 뜻이었다. 시민들의 이성과 상식을 믿었고 그들이 재판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이었다.

범죄자들의 불의와 탐욕을 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애매한 조문으로 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성문법을 편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본 철학자 아나카르시스(Anacharsis)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성문법은 마치 거미줄과 같은 것이어서 약하고 작은 것이 걸려들면 붙잡을 수 있어도,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걸려들면 갈기갈기 찢어진다.” 솔론이 친구에게 반박했다. “협정을 깨뜨려 어느 쪽도 득 될 것이 없다면 시민들은 협정을 지킨다. 나는 시민들에게 적합하도록 법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깨뜨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솔론의 기대를 벗어났고 친구의 통찰력이 옳았다. 아나카르시스가 이야기한 법망(法網)의 개념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의 거미줄은 어떤가?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는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나라와 국민에게 어울리는 수준인가? 

공기업 강원랜드에 지인들의 채용을 청탁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자유한국당 권성동 의원에 대해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청탁을 받았다는 강원랜드 대표는 부정 채용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은 반면, 채용을 청탁한 것으로 지목된 권 의원은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애국’, ‘경제’, ‘주인’ 등의 구호와 마주하게 된다. 그 구호를 볼 때마다 나는 종속성을 떠올린다. 노예처럼 부리려는 자와 노예임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많은 도시와 나라는 불행하다. 공정사회와 기회균등을 외치면서 뒷문으로 가진 자들끼리 거래하고 약자들의 등에 올라타는 정치인이 많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경제적 풍요의 나무에서 정신적 빈곤의 열매를 따고 있을까? 아테네 최초의 시인이기도 했던 솔론의 시는 마치 2600년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인에게 남긴 유언처럼 들린다.

지금 스스로의 비겁함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신들께 분풀이 하지 말라.
그대 스스로 호위병을 내주고 힘을 키워준 것이니, 
그리하여 지금 그 비천한 처지에 빠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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