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창수(소설가)
하창수(소설가)

군인 - 대부분은 남자였고 한시적이었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수의 인간들이 종사했던 ‘직업’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고, 그 전쟁의 역사에 동원된 자들은 시대와 장소에 예외가 없었다. 때로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자원을 하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뛰어든 경우도 있었지만, 억지로 전장으로 끌려가거나 언제든 끌려갈 준비를 하고 있던 게 대부분이었다. 그 배경에는 정의나 애국심 같은 거역하기 힘든 ‘명분’이 방울뱀처럼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달려드는 혹독한 ‘처벌’은 진짜 방울뱀의 공격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아직 성인이라 하기 힘든 열여섯 청소년부터 환갑에 이른 노인에게까지 지워졌던 ‘군인이 되어야 할 의무’는 신체 건강한 남자들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고, 고대에서 근대 이전까지 시대를 막론했다. 문제는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의무’로서의 병역(兵役) 혹은 군역(軍役)에 예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하층의 천민이나 노예에게 이 의무를 면제해준 건 군대의 ‘질’과 관련돼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만, 양반 같은 계급의 상층부, 관원이나 공신의 자손에게까지 병역을 면해준 데는 합리적 이유를 찾기 힘들다. 합리적이기는커녕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귀족이 더 큰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입각하자면 이런 식의 면제 행위는 도덕적 파탄에 다름없는 일이었다. 

왜구의 침략으로 나라 전체가 전란의 위기에 빠졌을 때 국경까지 도망친 선조(宣祖)와 장수의 옷을 입고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독려했던 그의 아들 광해군(光海君)이 선명하게 갈리는 지점도 이곳이다. 군주의 자격을 상실한 아비와 그 아비의 책무까지 견디며 살았던 왕자 - 이 막장드라마의 귀결은 인간과 권력의 씁쓸한 전범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더 이상 계급이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존재하지 않는 지금 우리의 사정도, 미안하지만, 전혀 낫다 할 수 없다.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남자 정치인들의 병역면제자 비율은 일반인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자식들을 국방의 의무로부터 풀려나게 해준 이유들을 들추어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허겁지겁 도망질에 바빴던 위정자의 몰골이 선연해진다. 인터넷 검색창에 ‘사회고위층 군면제자’를 입력했을 때 나타나는 이름들을 확인하며 일어나는 분노는 결국 참담한 자괴와 열패로 환원한다. 군인으로 복무한 것이 전혀 자랑스럽지가 않다는 것, 병역의 의무를 다한 건 쥐뿔도 가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 애국심이니 정의니 평화니 하는 저열한 속임수 프레임에 갇혀 아까운 청춘의 몇 년을 날려버렸다는 것 -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잘 벗어나지지 않는 ‘상대적 박탈’의 덫이다.

멀쩡한 치아를 뽑고, 소변에 자신의 피를 섞고, 정신질환을 앓았거나 습관적으로 어깨뼈가 빠진다는 가짜 진단서를 끊고, 커피가루를 마신 뒤 괄약근을 조여 순간적으로 혈압을 높이는 추잡한 짓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남의 나라 국적을 취득해 ‘합법적’으로 병역제외자가 되는 ‘건강한’ 젊은 남자의 수가 한 해 5천 명에 이르며 그 상당수가 서울 강남, 서초, 송파 3개 구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은 지금 한국의 도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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