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이진천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도대체 어쩜 그리 꽉 막혔을까? 언제나 자기 생각만 고집할 뿐이야! 이게 안 보이나?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상식이라고는 없는 거야? 이제 상종하기도 싫어!

누가 떠오르든 어떤 그룹이 연상되든, 이런 부류는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집안에 있으면 일상이 지옥일 테고, 같이 일을 해야만 한다면 심히 고통스럽다. 사실 행복한 삶의 조건은 다른 무엇이 충족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이런 사람들이 내 삶을 침해하지 않는 간결함이 행복의 조건은 아닐까. 물론 사회적 행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신기하게도 그 소리가 들린다. 인류 유전자에 내재된 효율적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보들 중에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인지하면, 에너지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를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 한다는데,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별로 들어맞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매사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지각하는가? 어쩌면 정보가 나를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구글과 네이버는 나의 취향까지 감안해서 제공해주지 않는가.

더 나아가, 인간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만 하지 않는다. 사실상 세상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선택으로 가득하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자신의 선입관과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뜻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세다. 판단의 근거와 정보가 객관적이냐는 상관하지 않는다. 선입견과 편견도 버려야 마땅한데, 고약한 확증편향에까지 이르면 사회에 해악이다. 

지금 누군가를 떠올리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확증편향은 누구나 지니고 있으니까. 만일 당신은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한다면, 그게 곧 확증편향이 강하다는 반증이 된다. 나도 그 누구도 이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옛 스승들이 애써 중용(中庸)을 강조했던 이유다. “내가 다른 건 꽤나 자신이 있는 편인데, 이 중용만큼은 좀처럼 되지 않는다.” 공자의 탄식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중용의 길은 객관·개방성·합리·지성의 길, 나아가 민주주의의 길이므로.

제목으로 돌아가서, 권력이 확증편향을 만나면? 일단 짚고 넘어갈 것은, 자신의 주관을 지니고 판단하는 것과 판단에 객관성을 상실한 확증편향은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우파든 좌파든 다른 뭐든, 상대의 주관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서로 개방적인 태도를 지닌다면 말이다. 

문제는 권력의 확증편향이 심화되어 판단에 객관성이 사라질 때다. 그 자리는 적폐들이 꽉 들어차므로 정치적 재앙이다. 인사는 혈연·지연·학연·보은·낙하산으로, 정책은 아집·무지·답습·과시·방만으로 퇴행한다. 이런 적폐가 권력의 울타리가 되고 급기야 올가미가 된다. 

자, 독자들은 이미 감을 잡으셨을 것이다. 의암호에 안개를 드리웠던 확증편향의 결말이 다가온다. 이미 새드 엔딩(sad ending)이 예상되었으나, 그동안의 피로감과 낭비는 대체 어쩔 것이냐? 이런 식으로라도 드러나지 않고 묻혀있는, 숱한 확증편향의 권력행사들은 또 어쩔 것이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능히 천하를 다스릴 재주, 녹봉도 사양하는 소신, 신념을 위해 시퍼런 칼날도 밟는 지조, 그런 능력자도 중용은 어렵다.” 

강원도와 춘천의 크고 작은 권력들이시여, 어려운 길로 가면 존중을 받습니다. 쉬운 확증편향을 버리시고 부디 어려운 중용의 길을 걸으시옵소서.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