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 요선동 권영돈 씨 편 - ①춘천으로 향하는 운명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 요선동 권영돈 씨 편 - ①춘천으로 향하는 운명
  • 홍석천 기자
  • 승인 2019.08.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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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선동의 부활을 꿈꾸면서 도시재생대학을 수료했어"

도시재생을 꿈꾸는 사람들’은 교동, 근화동, 소양동, 약사명동의 옛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과거의 조각을 모으고, 오래된 도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춘천시 사회혁신센터와 함께합니다.

1973년, 내 나이 스물아홉 살에 서울에서 춘천으로 내려왔어. 형님과 조카들이 여기 계셔서 이리 내려온 거야. 고향은 강릉이고 어릴 때 서울에 가서 10년 가까이 살았어. 강릉에 살 때 우리 집이 잘 살았어. 누님이 두 분 있었는데 큰 누님이 시집을 갈 때 까지만 해도 잘 살았지. 매형이 원주 사람인데 시집갈 때 옷을 70벌이나 해갔으니까. 시집도 잘 갔어. 매형 집이 그때 당시에 자가용 있는 집이었으니까.

그러다가 6·25전쟁이 난 거야. 북에서 사람들이 내려와서 마을 처녀들을 데려다가 북한 노래를 가르치고 했는데 큰 누님이 멋도 모르고 가서 배웠다가 국군이 수복해서는 누나를 내놓으라고 난리였지. 우리 어머니가 큰 누님을 친척집 할아버지가 사는 다락방에 숨겨 놨는데 누님을 내놓으라고 군인들이 옆에다가 총도 쏘고 그랬어. 겨우 20살 먹은 처녀가 뭘 아나? 그저 노래나 배우고 그런 거지. 우리 집이 좀 잘 살아서 그랬나 봐. 복숭아 과수원만 6천 평이었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복숭아밭이야. 내가 해방둥이야. 5월15일에 태어났는데 8월15일에 해방이 됐으니까 해방둥이지. 옛날에는 약도 안 쳤는데 복숭아가 그렇게 크고 탐스러울 수가 없어. 그런데 복숭아를 팔 때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나를 업고 머슴 둘에게 지개를 지워서 주문진까지 복숭아를 팔러 다녔데. 가다 보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아있던 기생집에서 복숭아를 많이 사. 그러면 기생들이 나를 보고 예쁘다고 입을 쪽쪽 맞추면서 귀여워했대. 그래서 그다음서부터는 싸개로 나를 폭 씌워서 보지도 못하게 했대. 우리 어머니가 노상 그 애기를 해. 내가 애기 때 예뻤나 봐. ㅎㅎㅎ.

도새재생대학을 졸업할 당시이 권영돈 씨
도새재생대학을 졸업할 당시이 권영돈 씨

그렇게 유복하게 살다가 전쟁이 나서 1·4후퇴 때 피난가고 그러면서 가세가 기울었지. 이후로 서울에 가서 고생한 이야기는 말로 다 못해. 얼마나 서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긴지. 열여덟 살에 서울로 가서 군대 갈 때까지 살다가 제대하고 4년 정도 서울에 더 있다가 춘천으로 온 거야.

처음에 서울에 가서 양복점에서 일하게 됐지. 당시에 을지로 입구에 양복점이 줄지어 들어서 있던 것 알아? 그중에서도 제일 큰 공장에 들어갔지. 미림라사라고 커다란 양복점이었어. 양복점 중에 주식회사는 미림라사밖에 없었어. 본점 있고 중앙지점 있고 광교지점도 있었지. 나는 광교지점에 들어갔어. 첨에 들어가서는 잔심부름이나 했지. 양복이랑 바지 꿰매는 사람이 우리 지점에만 30명 정도 됐어. 가봉하는 아가씨도 5명이 있었고. 세 지점을 다 합치면 200명이나 됐지. 본점에는 아마 100명도 넘었을 거야. 당시에 영화배우 이대엽이니 김추련이니 하는 유명인사들이 다 우리가게에 왔었어. 양복회사라고하면 요즘 기성복 만드는 회사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그게 아니라 맞춤양복을 만드는 회사야. 맞춤양복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 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갔지. 60년대에 사장이 벤츠 타고 다녔으니 뭐 말 다 했지. 당시에는 외국에서 귀빈이 오잖아? 좋은 차를 갖고 있던 차주들은 차를 나라에 강제로 대여해야 했어. 우리 사장 차도 항상 끌려 나갔지. 그런 시대였어. 거기서 1년 이상 잔심부름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공장에서 옷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지.

2년 정도 일하다가 군대에 가게 된 거야. 제대하고 나서도 다시 거기로 갔어. 그때는 공장이 아니라 가게에서 일하게 됐어. 재단사 밑에서 ‘무꼬’로 들어갔지. 일본말이야. ‘건너편’을 뜻하는 말인데 재단사 건너편에서 도와주는 일을 하니까 ‘무꼬’지 뭐. 종이에 재단을 해 주면 천에다가 놓고 자르는 일을 주로 했어. 웬만한 사람은 안 시켜줘. 공장에 있다가 가게로 가는 일은 잘 없지. 내가 손재주를 인정을 받았거든. 또 당시에 얼굴이 좀 괜찮았다고. ㅎㅎㅎ. 그렇게 재단사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된 거지 뭐. 거기서 일을 배워서 스물아홉 살에 내 사업을 해 보려고 춘천에 오게 된 거지.

홍석천 기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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