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마임 30년 그리고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

허허 벌판에 쌓인 눈 위에서도, 40℃로 들끓는 광장에서도 눈을 가린 채 맨발로 서서 ‘레고랜드 강행 저지 모임’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낱 홀로 활동하는 문화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 밖에 없다. 눈앞의 이익을 쫓으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 법인데 물려받은 유산을 깔아뭉개고 비현실적인 경제논리와 비리로 얽힌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세력에 나설 수 있는 방법이란 그의 무기인 ‘마임’으로 의지를 표현 하는 것뿐이다.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유진규 마임이스트. 춘천마임 역사 30년, 춘천마임축제도 30주년이 되는 올해, 축제의 앞부분 25년을 이끌어 온 그가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리라 보인다.

축제를 만들고 성장시켜온 그에게 전체 스토리를 들으려 하자 A4 용지 열장 분의 약력 본을 쥐여 준다. 그도 가물가물한 역사를 제자 노영아 마임이스트가 곧 있을 공연을 준비하며 정리한 것이란다. 스스로도 얽히고설킬 법도 한 방대한 스토리를 연도별로 따라가 봤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70년 건국대학교 수의학과를 다니며 연극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당시 군부정권은 대학 내 분위기까지 장악했고 그 분위기를 피하고자 연극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1972년 극단 ‘어제 또 실험실’의 작품 ‘첫 야행’을 통해 몸으로 하는 연극, 팬터마임에 데뷔했다.

유진규 마임이스트
유진규 마임이스트

스물다섯이던 1976년엔 마임을 주제로 한 개인공연을 열었다. 그에게도 한국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79년과 1980년 서울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은 그를 벗어나고 싶게 만들었고 1981년 결혼과 함께 춘천시 신동면 시골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그리고 소를 키웠다. 소를 키우는 일은 정서적·경제적 안정감을 줬다. 일에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소 값 안정화 정책이 가격폭락으로 이어져 어려움에 봉착했다.

축산업을 접고 1985년 강원대학교 근처 카페 ‘아름다운 무대’를 경영하며 공백기를 극복해나갔다. 마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가 이 무렵이다. 1988년 그의 이름을 건 팬터마임 ‘억울한 도둑’, ‘낚시터’, ‘망령’ 등으로 재기하고 1989년 제1회 한국마임페스티벌에 오른 ‘홍수로 인한 침수’ 공연이 춘천MBC 방송을 타며 춘천에서 마임축제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25년간 춘천 마임축제를 이끄는 예술 감독을 역임했다.

축제의 초반기 마임 작품들은 그와 제자들의 창작 작품과 한국마임협회 작품들로 채워졌다. 1995년 축제에서 매년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것에도 어려움이 생기자 국제 작품이 들어오는 마임축제로 확장했다. 

1998년 소극장 ‘마임의 집’을 개관해 상시 공연을 열고 창작의 장소로도 활용했다. 2000년 한국 전통 축제는 밤새 즐겼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고안해 ‘도깨비 난장’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장을 마련했다. 마임은 물론 음악·무용·퍼포먼스·설치문학·단편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새벽까지 9시간 동안 야외무대에서 이어졌다. 이 도깨비 난장은 점점 입소문을 타 5월 말 새벽추위를 견디고자 담요를 싸든 시민들이 줄을 지어 입장할 정도로 발전했다.

2002년 마임의 집이 ‘춘천예술마당 마임의 집’으로 이전되며 춘천 마임축제가 사단법인으로 태어났다. 8년 뒤 마임 창작활동의 본거지였던 마임의 집이 333회의 공연으로 문을 닫으며 (사)문화프로덕션 도모에게 기부됐다. 2010년 5월19일 현재 춘천의 활발한 공연장소인 축제극장 ‘몸짓’의 개관이 계기였다.

2013년 마임축제의 예술 감독을 사퇴하고 같은 해 12월 복합문화공간 ‘빨’을 개관했다가 2년 만에 폐업을 결정하고 지금까지 자유로운 창작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방대한 그의 약력에서 작품에 영향을 줬던 사건을 찾아봤다. 그중 하나가 1996년 찾아온 뇌종양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걸 끊고 9개월간 지리산에서 수양을 하자 암이 사라졌다. 의사도 가족들도, 그 자신도 모두 놀랐다. 암은 사라졌지만 죽음과 인접했던 경험은 삶과 그의 작품에 다른 시선을 제시했다. 보이지 않는 영혼과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가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빈손’ 사진=유진규
작품 ‘빈손’       사진 제공=유진규

그간 사회를 풍자하거나 변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창작의 주제였다면 뇌종양과의 싸움에서 이긴 그는 영성을 드러내는 전통무용이나 ‘몸짓’에 집중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작품에서 그의 눈빛은 섬뜩하게 날이 서있었다. 죽음과 소유의 관계를 그린 그의 대표작 ‘빈손’이 그렇게 탄생한다.

2013년 또 다른 역경이 찾아왔다. 큰 축제를 이끄는 데는 많은 문제들이 연이어 오기도 했지만 창작영역에 대한 분쟁에서는 타협이 안됐다. 사건은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취임됐을 시기, 마임축제 출연 예정자가 박정희·육영수 사진 앞에서 찍은 손가락 욕 사진이 퍼지면서 시작됐다. 박사모 등 단체들의 댓글 공격과 협박도 당했다. 이에 춘천시와 내부 운영진은 출연자를 교체하라고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문제에서 물러날 수 없었던 그는 공연을 강행하고 축제가 끝난 후 25년간 이끈 마임축제의 예술 감독직을 그 스스로 내려놨다.

이후 그가 설 무대는 좁아졌고 몸과 마음이 어려웠지만 마임은 놓지 않았다. 예술 감독을 내려놓은 지 6년째, 손에 쥔 것이 없다는 건 자유롭단 뜻이다. 이후 무대는 흙바닥, 아스팔트와 같은 거친 무대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서 온몸을 불사르며 자유로운 광대로 거듭났다. 지금으로선 춘천마임을 함께한 시민에게 감사하고 제자로 남아있는 노영아 마임이스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의 47년 마임인생과 ‘춘천마임 30년’을 쉽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스토리를 남겼고 정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많은 스토리를 그는 써가고 있다. 

마임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이듯이 마임을 향한 외골수 인생을 산 그의 삶을 지면에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그의 삶에 대한 여정을 뒤따라 가 보고자 한다면 16일부터 축제극장 몸짓에서 진행되는 그의 공연장을 찾아가 보자.

유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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