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백경미 (양구 방산중 교사)

창문에 앉은 매미가 따갑게 울어댄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철, 더위를 배가 시키는 그 소리에 살짝 짜증이 나다가도 안쓰럽다. 두터운 굼벵이 갑옷을 벗어던지는 매미를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었다. 처음 허물을 벗어난 매미의 날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여리고 보드라운 풀색 빛깔로 비단처럼 예뻤다.

어디서 저런 빛깔을 입고 왔을까 생각하는 찰나 금방 갈색으로 변하던 그 안타까웠던 순간, 나는 제르트뤼드(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교향악》의 주인공)를 떠올렸다. 눈이 보이지 않던 그녀에게 세상의 모습과 색깔을 언어로 그림 그리듯 설명해 주었던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려졌던 그녀만의 아름다운 세상. 그러다가 눈을 뜨고 실제로 만난 현실 속의 세상. 상상과 현실속의 세상이 너무나 달라서 느껴야 했던 그 괴리감에 결국 죽음을 선택했던 제르트뤼드. 너무 비약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매미가 그 오랜 시간을 견디고 맞이한 세상은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건 순전히 그 짧은 순간 덧없이 스러졌던 매미의 여린 풀빛 날개 때문에 생긴 상념이다. 

여린 풀빛 보드라운 날개 그리고 탄생과 죽음. 이 기막힌 카테고리 속에서 나는 베르디(Verdi)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1막 전주곡을 떠올려 본다. 대부분 오페라의 줄거리를 음악적으로 압축해서 극을 시작하기 전 연주하는 기악곡을 서곡(Overture)이라 하는데 유독 이 오페라는 전주곡(Prelude)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이하게 1막, 2막, 3막에 모두 전주곡이 사용되었다.

전주곡은 서곡에 비해 독립성이 적은 소품으로 전주곡에서 바로 1막으로 연결되어 연주되기도 한다. ‘라 트라비아타’ 1막 전주곡은 Adagio b minor - E major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첫 시작은 아주 가냘프고 애수에 찬 현악기의 선율로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듯 여리고 여린 PP(아주 아주 여리게)로 마음에 묻어 심장 끝까지 주욱 흘러든다. 아주 느리고 애처롭다. 

주인공 비올레타는 폐병에 걸린 고급 매춘부로, 그녀가 알프레도라고 하는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삼류소설처럼 귀족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이별,  진심어린 사랑의 승리로 결혼 승낙을 받아내지만 끝내 불쌍한 비올레타는 폐병으로 숨진다는 비극이다. 

흔하고 통속적인 내용이지만 음악은 너무나 아름답다. 잔잔하고 두려운 사랑처럼 조심스럽게, 숨소리조차 소음이 될 듯한 분위기로 단조의 선율이 가만히 흐른다. 그러다가 장조로 조가 바뀌며 주제 선율이 조금은 분위기가 밝아 진 듯 연주되지만 여전히 밑바닥에 깔린 느낌은 애수적이다. 관악기가 리듬을 슬쩍 바꿔 주며 연주되다가 곧바로 제2바이올린이 바톤 터치, 이어서 콘트라베이스와 첼로에 제1바이올린이 더해지며 아름답게 고조되었다가 그대로 꺼져가듯이 끝을 맺는다. 그리고 전주곡답게 곧바로 1막으로 연결된다. 

굼벵이 허물 벗는 모습에서 그 짧은 생을 살아갈 매미의 허무함에 제르트뤼드가 생각났고 그 여리고 보드라운 풀빛 날개의 이미지로, 비올레타의 짧고 슬픈 사랑을 노래한 이 음악의 선율을 떠올려 본다. 세상에 그냥 하나인 것은 없다. 스쳐 지나는 일상 속에도 보석처럼 흐르고 엮이는 문학과 음악이 있으니 말이다. 혹시 지금 무심히 내 곁을 지나는 일상에서 내가 놓치고 그냥 보내는 보석은 없는지 잘 음미해 볼 일이다.

저작권자 © 《춘천사람들》 - 춘천시민의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